[향토문화] 제주불교 활성화에 영향, ‘제주의 큰스님’..오라2동 김석윤 지사 본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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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불교 활성화에 영향, ‘제주의 큰스님’..오라2동 김석윤 지사 본적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4.23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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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일제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오라2동 김석윤 지사 본적지

위치 : 제주시 오라2동 644번지(정실4길22-1)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

 오라2동_김석윤집터

 

오라2동_김석윤본적지


본관은 광산(光山), 김창규(金昌圭)의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조선불교조계종대흥사 승적부에는 출생지는 이도리 38번지, 본적지는 오라리 644번지, 주소는 관음사라고 되어 있다.

처음 이름은 석명(錫命), 자는 근수(謹受), 호는 석성(石惺)이다. 김근수(金勤受)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자라면서 박춘경(朴春卿), 장기찬(張基璨)에게 기초 한문을 배우고 1887년 10살 때 운감(雲龕) 김병규(金炳奎)의 광양서재(光陽書齋)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 학문을 익혔으며, 14세 때 김설월(金雪月) 문하에서 금강반야경을 수학했다.

1893년 전남 해남군 대흥사(大興寺)에서 스님 주운담(朱雲潭)의 문하에서 1년 동안 불법을 익히고 전북 완주군(完州郡) 위봉사(威鳳寺)에서 5년 간을 수도하였다. 1898년 2월 대흥사에서 조운담(趙雲潭)을 스승으로 내전 초등과를 수료하였다.

또한 그는 경서에도 능통하여 22세에 광양사숙(光陽私塾=광양서재)의 훈장, 30세에 연동촌 문귀사숙(文龜私塾)의 훈장을 역임하였다.

1902년 1월 경남 통영군 용화사에서 이동운(李東雲)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1908년 비구니 봉려관 스님을 도와 관음사를 창건했을 뿐 아니라 법정사 창건에도 기여했다.

법명은 종화(鍾華), 법호는 상운(祥雲)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불교에 몰입하게 된 연유는 스승 김병규의 교육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1908년 호남의 장성(長城)에서 거의(擧義)한 의병장 기우만(奇宇萬)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던 중 1909년 고사훈을 만나면서 의병 거사가 급진전되었다.

동지를 규합하여 제주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민병(民兵)을 모아 의병장에 고사훈(高仕訓), 이중심(李中心) 양인을 추대하고 김석윤은 의병 참모로 소임을 맡았다.

제주의 의병 활동의 원인(遠因)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 황제를 군대로 위협하여 강제로 퇴위시킨 일로부터 시작된다. 또, 일본은 우리 나라의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을 붙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데 대해 온 국민이 분노가 분출, 국권 회복을 외치는 데서 일어난 거사였다.

또 근인(近因)으로는 1908년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統監部)의 경부(警部) 시미츠(淸水重滿)을 임명하여 일본 경찰 다수를 인솔하여 부임, 대정ㆍ정의ㆍ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分派所)를 설치하여 도민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8년 12월에 윤원구(尹元求) 제주군수는 '일본이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직을 사임하고 이 섬을 떠났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성(州城)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仕訓:39, 의병장), 이석공(李錫公:개명 中心), 김석윤(金錫允=錫命), 조인관(趙仁官=趙丙生), 노상옥(盧尙玉) 등이 거사를 의논한 핵심 인사였다.

고사훈은 한문 서당 숙장 김석익(金錫翼)과 고성모(聖模)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1909년 2월 25일 조인관의 집에서 고사훈ㆍ이중심ㆍ김석윤ㆍ노상옥ㆍ김재돌(金詛)ㆍ양남석(梁南錫)ㆍ한영근(韓永根)ㆍ김만석(金萬石:25) 등이 모여 기병(起兵)할 것을 결의하였다. 김석윤은 자신의 전답을 팔아 재정을 마련하였다.

결전(決戰) 거사일을 동년 3월 3일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하여 격문과 통고문을 2월 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돌려, 병력 동원차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당일 영락(永樂)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ㆍ안성ㆍ광청 등지에서 장정 3백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 때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는 관군ㆍ장정 30여 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 활동을 차단, 이에 출동하여 무력에 의존한 경찰과 맞설 수 없어 2월 28일 그만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되었다.

순사(巡査) 강원호(康源鎬)는 조인관을 체포하려 했으나 뿌리쳐 도주했다. 동 3월 3일 고승천과 김만석은 총살되었고, 3월 4일 의병 참모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중심, 조인관, 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경에 체포된 김석윤은 1909년 4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 10년이란 유형(流刑)이 선고되자 제주유림이 항소(抗訴)를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1909년 7월 22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 때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판결》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이도리 피고 김석명 33세
위 자에 대한 내란 피고 사건으로 융희3년 4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가 선고한 유죄(유형10년) 판결에 대하여 피고로부터 공소를 신립하였기에 본원은 검사 오무라(大村大代)의 입회로 심리를 수행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원판결은 취소한다. 피고 김석명을 무죄로 하고 압수 물품은 차출인에게 돌려준다.


〈이유〉
피고 김석명이 정치변경의 목적으로 내란을 일으킬 것을 기도하고 융희3년 2월 25일 고승천 이중심 외 수명과 함께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 집으로 회합하여 난민 모집의 격문을 작성하고 이를 제주도내 각지로 발송하고, 동년 3월 3일을 기하여 제주성내 관덕정으로 집결하고, 거사하려 하여 고승천은 동도(同道) 대정군으로 달려가고, 피고는 집에 있어서 고승천의 거사를 기다혀 이에 응할 태세를 갖추고 즉일 고승천 외 수명은 대정군으로 달려가서 인민을 위협하고 다수의 도당을 집결하여 이를 인솔하고, 제주성내로 침입하려 할 무렵 동군 광정리(광청리)에서 경찰관과 출돌하였다는 사실은 증빙이 불충분하므로 피고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함이 가하고 압수 물건은 모두 차출인에게 반환하기로 한다. 그래서 원재판소가 위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의 판결을 한 것은 부당하여 공소는 이유가 있으므로 민․형 소송 규칙 제33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이후 불교에 더욱 정력을 쏟아 안봉려관(安蓬廬觀)이 색수수(塞水藪)에 관음사를 창건할 때 불교를 설법하며 많은 재력을 쾌척(快擲)하였다. 또 민족종교인 보천교를 믿게 되었으니 보천교는 동도(東道)의 화신(化身)이며 다시 미륵교(彌勒敎)에 귀의했으니 미륵교는 보천교의 분형(分形)이다.

이럴수록 일제로부터의 감시가 심해져 전북 정읍(井邑)군으로, 또 전주의 동곡(銅谷)으로 옮겨 살았다. 1916년 위봉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부산 범어사에서 오회현(吳晦玄) 스승으로부터 대교과를 수학하였다.

1930년 2월 위봉사 말사 청련암의 감원(監院)에 취임한 바 있으며 1934년 범어사 제주포교소 월정암, 이어 위봉사 표선면 포교소를 설립, 위봉사 하례포교소 설립, 관음사 평대포교소, 관음사 소림원포교소 등의 감원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일제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그의 사진은 보면 상투에 정자관까지 쓴 모습이 영락없는 유생이지만 17살 때 스스로 발심출가한 뒤 20년간 선방에서 정진한 선승이다.

당시 제주불교 특성상 스님들이 삭발염의를 하지 않고 결혼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불교와는 다른 점이 있지만 독립운동뿐 아니라 제주불교 활성화에 막대한 영향을 줬던 ‘제주의 큰스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국이 광복되어 대한불교 제주교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46년 5월 구좌읍 김녕리의 백련사(白蓮寺)의 주지로 만년을 보냈다. 당시 저명인사였던 김석익이 1949년 기록한 ‘망형석성도인행록’(현재 국립제주박물관 소장)에는 “아아! 공이 종교에 귀의한지 40년이 되었다.

그 동안에 세 번 감옥에 갇혀서 갖은 고초를 다 맛보면서도 한결같이 불교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어찌 이른바 물리적인 힘으로 공의 뜻을 굴복시킬 수 있었겠으며 온갖 어려움인들 공의 뜻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라고 찬탄하고 있다.

승려 김석윤은 일제강점기라는 혼돈의 시기에도 새로운 사상을 배우려는 열린 마음과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해낼 수 있는 의지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막내아들 김덕수는 제주4.3 때 1948년 12월 월정사가 방화될 때 절을 지키려다 토벌대에 의해 끌려가 아라동 박성내에서 학살당하였다. 당시 19세였으며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였다.

덕수 스님이 학살당한 이후 김석윤 스님과 맏아들 김성수(金性洙:법호 景照) 스님, 둘째 김인수(金仁洙:법호 淨熙) 스님도 차례로 돌아가셨다. 그의 묘는 오등동 병문천 서쪽에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탄신 1백 주년인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또한 이 해에 제주시 사라봉 남쪽 기슭에 「의병항쟁 기념탑」이 세워지고 모충사(慕忠祠)가 건립되어 도민의 숭앙을 받고 있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석윤 지사가 살던 집은 4·3 당시 소실되었고, 현재는 다른 소유자의 가옥이 들어서 있다.
(디지털제주문화대전, 북제주문화원장 김찬흡의 글, 법보신문 2013-08-19 한금순의 글, 제주도독립운동사적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작성 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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