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비양도, 섬따라 사람따라
상태바
(특별기고)비양도, 섬따라 사람따라
  • 고희범
  • 승인 2010.09.08 0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켜야할 환경)고희범 제주포럼c 대표,비양도 탐방 후기




비양도가 "제주포럼C"의 세번째 탐방지로 결정된 뒤 비양도를 가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학 재학중이던 1971년 쯤 여름에 다녀온 적이 있어 "오래 전에 이미 갔다 왔다"고 대답하자 그건 다녀온 게 아니란다. 4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비양도는 포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뒷동산 오르듯 단숨에 올라갔던 비양봉, 작은 등대가 전부였다. 40년 세월에 비양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협재에서 "뗏마"를 타고 갔던 것과 달리 한림항에서는 40명 정원의 그럴 듯한 도항선을 탔다. 풀숲을 헤치며 올랐던 비양봉에는 말쑥한 모습의 나무계단이 놓여 있었고 정상 주변에는 철망이 설치돼 있었다. 좁은 흙길이었을 일주로는 대형트럭도 달릴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시멘트로 포장된 채 섬을 휘감고 있었다. 아이들 4명이 재학중인 협재초등학교 비양분교에 40년 전 그 때는 몇 아이나 다니고 있었을까.



겉모습이 달라진 것은 대수롭지 않았다. 비양도가 왜 "화산섬"으로 불리는지, 비양도 어촌계의 안타까움이 무엇인지, 섬을 빙돌아 해변 풍광이 어떤지 당시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양도는 바다 밑에서 일어난 화산폭발로 형성된 섬이 아니다. 도내 360여개의 오름 처럼 육상에서 형성됐고 형성 당시에는 제주도 본토와 연결돼 있다가 7,500~8,000년 전 해수면 상승으로 섬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양도의 화산 분출은 고려 목종 5년(1002년) 5월로 고려사절요에 기록돼 있어 "천년의 섬"으로 불린다.

비양도는 "화산섬"으로 불려도 좋을 만큼 화산폭발의 흔적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입상기암(立狀奇岩)군을 포함해 해변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린 화산탄과 분석구, 일주로 변의 송이더미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널려있던 화산탄들은 암석 반출이 금지되기 전 외부인들이 가져가 지금은 그리 많지 않다.



두터운 송이층으로 이루어진 해안가 벽이 무너져 내렸다. 이런 침식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아기 업은 돌"로 불리는 대표적인 입상기암 주변에는 몇개의 수형암맥(樹形岩脈)들이 서 있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다. 지하의 마그마가 땅 위로 솟아올라 형성된 이들 수형암맥은 국내에서는 비양도의 이것이 유일하다.


화산폭발과 함께 공중으로 한참을 날아오른 뒤 굳은 상태에서 떨어진 화산탄은 공기의 저항을 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분석구는 비탈을 구르면서 둥그런 모양을 하게 된 용암덩이다.

침식이 진행되면서 단단한 부분이 해안선 근처에 작은 바위섬으로 남아있는 것을 "시스텍"(Sea Stack)"이라고 부른다. 비양도의 대표적인 시스텍인 "코끼리 바위"는 코끼리가 그 긴 코를 바다에 담그고 서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비양도의 속살을 제대로 보기 위해 탐방 날짜까지 애초 매달 둘째주 토요일에서 한 주를 앞당긴 터이다. 썰물 때에 섬을 일주할 수 있도록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용암해변이 걷기 불편하다고 코끼리 바위까지 가는 것을 어찌 마다하랴. 밀물 때면 바다 한가운데 서있는 코끼리 바위를 우리는 속속들이 돌아볼 수 있었다.

시스텍 "코끼리 바위". 멀리서 보이는 코끼리 모양이 완연하다.








일주도로 안쪽에 있는 "펄랑 못"은 작은 호수 처럼 보였다. 비양봉 한 귀퉁이를 감싸듯 펼쳐진 못은 바닷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염습지"다. 시멘트 포장도로에 물이 갇혀 염도가 높아지면서 파래도 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일주도로 밑으로 구멍을 냈지만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비양도에서 화산폭발이 있은 지 1천년이 되던 해인 지난 2002년 천년축제가 마련됐다. 비양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비양봉 정상 부근이 무너져 내려앉은 것도 그때였다. 더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 비양봉에 이르는 나무계단 옆으로 철망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점심식사를 한 뒤 일행들은 낚시를 했는데 낚싯줄을 던지자 마자 연신 고기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한번도 낚시를 해보지 않았다는 참가자들도 "물 반, 고기 반"이라며 좋아했다. 비양도 주변의 어족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런 탓인가. 비양도 주변 바다를 한림읍내 9개리의 어촌계가 차지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비양도 인구가 적어 그렇게 됐다고 했다. 집 앞 바다에서 작업을 하다가 다른 마을 어촌계의 단속을 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도 했다.




비양도에 하나밖에 없는 수퍼 겸 식당인 민경수퍼의 보말죽은 보말이 풍성하게 들어있어 씹히는 맛이 그만이었다. 반찬으로 나온 굼벗무침도 금새 동이 났다. 일행들이 낚은 고기로 끓인 "어라면" 또한 참가자 56명 모두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예정시간 보다 일찍 서둘러 섬을 떠나야 했다. 결혼잔치가 끝나기 전에 제주시에 있는 잔칫집까지 가야 한다고 도항선 선주가 재촉한 탓이다.




섬 중의 섬 비양도. 비양도의 그 많던 화산탄과 분석구는 지금쯤 어느 곳 정원을 장식하고 있을까. 바닷물 유입이 충분치 않은 펄랑 못 염도는 얼마나 더 높아질까.

비양도 어촌계가 차지하고 있는 비양도 서쪽 바다로 구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예초기를 들고 포구를 향해 걸어가던 가족은 벌초를 마친 뒤 땀 씻을 사이도 없이 막 비양도를 떠났다. 아담한 비양분교는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어머니 마냥 조용히 서 있다.

포구 앞 작은 건물 그늘에서 쉬고 있던 노인 몇 분이 "다시 오라"며 우리를 배웅했다.

글 사진=고희범 /제주포럼c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