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8천년을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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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8천년을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자연"
  • 고희범
  • 승인 2010.11.17 0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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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환경)고희범의 생태탐방..화산학 교과서 수월봉





제주도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돼 자연환경 관련 3관왕을 차지했다는 뉴스가 보도된 지 한달 반.

- 제주도 어디가 지질공원이 됐다는 거지?

= 제주도 섬 전체다.

- 그럼 어딜 가면 지질공원 관광을 할 수 있는 건데?

= 대표 명소 9곳 가운데 아무 데나 가면 된다. 한라산, 일출봉, 수월봉, 만장굴, 산방산, 용머리해안, 주상절리대, 서귀포층, 천지연폭포가 그곳이다. 2019년까지 23곳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 전 세계에 지질공원은 얼마나 많지?

= 25개국의 77곳이다.

- 인증 기준은 뭔데?

= 우선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있고, 희귀하고, 경관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환경과 관련한 해설과 교육, 지질관광이 활발하게 이뤄져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곳이라야 한다.



도내 360여개의 오름 가운데 하나인 한경면 고산리 수월봉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다른 오름들 처럼 올라가선 안된다. 작은 구릉 모양이어서 올라갈 만큼 높지도 않다. 해안절벽을 따라 빙 돌아가며 오름 아랫도리를 둘러보아야 하는 곳이다.

수중 화산폭발로 형성된 탓에 다른 오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정한 기준에 들어맞을 만큼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있고, 세계적으로 희귀한 데다, 그야말로 경관이 아름답다.





1만8천년 전 지금의 수월봉과 차귀도 사이 중간 지점의 바닷속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물과 반응한 해저의 마그마가 폭발하면서 바닷물 위로 화산재와 수증기가 격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화산재는 바닷물 때문에 대기중으로 솟구치지 못한 채 옆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화산가스와 함께 물 밖으로 빠져나온 화산재와 돌멩이들이 지표면을 따라 빠르게 흘러간다. 입자가 굵은 것들은 가까운 곳에서 흐름을 멈추고, 입자가 작은 것들은 멀리까지 흘러가게 된다.



수중 화산폭발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화산가스, 수증기와 뒤섞여 사막의 모래폭풍 처럼 빠르게 땅위를 흘러가면서 거대한 화산재층을 쌓아 만든다. 땅 위로 흘러나가 굳어버린 화산재 위로 다시 화산재 더미가 흘러 여러 겹의 퇴적층이 생긴다.



수월봉은 절벽 아래 해안 '엉알'을 따라 걷다보면 온갖 모양의 퇴적구조를 생생하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화산재의 분출과 퇴적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어 '화산학 교과서'로 불린다.


그러니까 화산섬 제주도의 지표면을 이루고 있는 현무암 위로 진흙이 쌓여 있었고, 차귀도와 고산 사이 중간 쯤 바닷속에서 수중 화산폭발이 일어났는데, 땅 위를 흘러간 화산재의 퇴적층이 수월봉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 과정들을 수월봉은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어느 만큼 화산재가 쌓인 뒤에 또다시 연속적인 수중폭발이 일어나면서 화구 주변에 있던 돌이나 바위조각들이 튀어올라 화산재 퇴적층에 박히기도 한다. 이런 경우 화산재층의 결이 끊기거나 살짝 흔들린 것처럼 내려앉는다. 이런 구조를 '탄낭'이라고 한다.





현무암과 달리 이 화산재 퇴적층은 파도에 쉽게 침식당한다.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깎여나가기도 한다. 바로 바다에 면해 있어 파도가 닿을 수 있는 지점은 이미 상당부분 침식이 진행중이다.

이날 해설을 맡은 안웅산 박사(제주도 TF팀)는 2004년 처음 수월봉에 왔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벽이 움푹 패여나간 현장을 소개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급속하게 침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지금 같은 속도로 패인다면 수월봉 위에 들어선 고산기상대 건물도 언젠가 남아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래 부분이 파이면서 내려앉은 곳도 있다. 수월봉에서는 이렇게 무너지는 낙석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3~4m 높이의 현무암 층을 앞에 두고 있는 지점은 멀쩡하다. 마치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것 처럼 보일 정도다. 현무암층이 방파제 구실을 한 것이다.






이곳 처럼 특별한 지점이 아니면 파도를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만8천년의 세월을 파도와 싸우며 견딘 수월봉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2차대전 당시 결7호작전에 따라 제주도를 마지막 결전장으로 삼으려 했던 일제는 이곳 수월봉에도 동굴진지들을 파고 바다를 향해 포를 설치해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노역은 고산지역 주민들의 몫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동굴진지 앞으로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입구의 높이가 좁아졌지만 안으로는 50여m나 뚫려있다.



제주도가 유네스코의 지질공원 인증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교육용으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지금 수월봉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적당한 자리에 안내소가 들어서서 탐방객들에게 제공할 안내책자도 비치하고 쉬운 말로 설명해주어야 할 해설사도 있어야 한다.



사실 일본어로 번역된 지질학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온 탓에 모두 다 한자말인 데다 익숙한 단어들이 아니어서 친절한 설명이 없으면 이해할 수가 없다. 화산재를 '응회'라고 하고, 화산재로 이루어진 낮은 구릉 형태의 오름을 '응회구'라고 한다.

돌멩이나 바위조각 따위로 이루어진 것은 '분석구', 화산가스와 함께 터져나온 것들을 '화쇄', 이것들이 빠르게 땅 위를 흘러가는 것을 '화쇄난류' 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쉬운 우리말로 고치는 일을 빠뜨릴 수 없다.



더 시급한 것은 기본적인 관리다. 수월봉 아래 해안 '엉알'은 파도에 밀려온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각종 폐어구는 물론, 중국상표가 붙어있는 병 따위가 널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 쓰레기가 제주도에서 버려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막아낼 길이 없으니 쓰레기가 들어오는 대로 치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질공원 인증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도 수월봉을 비롯한 대표 명소들이 지역경제에 이바지해야 한다. 고산 일대의 농수산물을 비롯한 특산물 판매 등을 통해 지역주민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행정기관과 주민들의 과제다. 수월봉 주변에 흐드러진 감국도 지역특산물로 제 격이다.


11월 중순 수월봉을 장식하는 감국. '수월봉 국화차' 상표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수월봉 이웃에 있는 당산봉은 수월봉 보다는 다소 높은 '응회구'이다. 우리는 '생이기정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올레길을 따라 당산봉을 오르기로 했다. '새들이 많은 절벽 길'이라는 뜻의 제주어라고 한다. 이 길은 널찍하게 뚫려있고 거기다 포장까지 돼 있었다. 얼마 전 제주도가 2억7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이렇게 꾸며 놓았다는 것이다.







새 소리와 함께 바지 가랑이에 부딪치는 풀잎의 느낌, 발 밑에서 폭신거리는 흙길. 육지의 도시인들은 이런 것들을 찾아 이 시골구석까지 오는 것이다. 넓고 크고 편안하고 화려한 것들에 매일 지겹도록 짓눌려 살던 사람들이 해방감을 느끼려고 이런 길을 찾아오는 것이다.



오솔길을 망쳐놓은 이들이 지질공원의 대표 명소 수월봉을 어떻게든 꾸미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수월봉이 파도에 침식되는 것을 막는다고 엉알에 인공구조물을 설치하겠다고 덤빌지도 모를 일이다. 1만8천년을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자연 앞에 함부로 나대서는 안된다.



차귀도와 나란히 떠 있는 '누운 섬'(와도)은 생이기정길에 들어서자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붙여진 이름답게 이곳 지질공원의 경관을 조용히 빛내주고 있었다.




어려운 지질학 용어들과,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과, 엉알의 해양쓰레기와, 파헤쳐진 오솔길과, 무리지어 노랗게 피어난 감국을 머리와 가슴에 품은 채 드넓은 고산평야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서있는 수월봉을 뒤로 하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글 사진 고희범 제주포럼C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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