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은둔의 도읍지 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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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은둔의 도읍지 성읍
  • 고희범
  • 승인 2011.01.23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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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제주포럼C 공동대표)



5백년 도읍지는 은둔의 땅 처럼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상태가 한동안 유지됐다.

조선 세종 4년(1423년) 정의현의 도읍지가 된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는 이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정의현과 대정현이 제주군으로 합병되면서 도읍지의 지위를 상실한 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성읍리는 1915년 제주군이 폐지되고 도제(島制)가 실시되면서 표선면의 면소재지였다가 1934년에는 면소재지도 표선리로 옮기게 되면서 행정적인 지위를 잃게 됐다.

자연히 "글 읽는 소리 뚝 끊겨 옛 풍류 사라진" (오문복 선생의 시 "영주풍아(瀛洲風雅)" 중에서) 마을이 된 것이다. 제주도의 해안을 따라 건설된 일주도로마저 표선리를 통과하면서 다른 지역과 소통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성읍리에 처음 버스가 들어온 것은 1966년. 그것도 겨우 하루 1번 들어오고 나간 것이다.

버스가 마을에 들어올 시간이 가까워오면 아이들은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인 정의현청 뒤 느티나무에 올라가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를 나무 아래 있는 아이들에게 중계하거나 땅 바닥에 귀를 대고 버스의 경유 지점을 추측해내곤 했다.

교통이 원활하지 않던 당시 버스가 도착하면 동네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정류장에 몰려나가 신기한 일이라도 대하듯 어떤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왔는지 살필 정도였다고 한다.

영주관 뒤의 1천년 된 느티나무. 아이들이 이 나무에 올라 버스가 어디쯤 오는지 살피기도 했다.




제주포럼C의 일곱번째 제주탐방은 "제주 행정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성읍마을 일대에서 이 마을 출신인 강문규 <한라일보> 논설실장의 해설로 진행됐다.



조선 태종 16년(1416년) 제주도는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3읍 체제를 갖추게 된다. 정의현의 애초 도읍지는 성산읍 고성리였으나 고성의 위치가 현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 행정적으로 불편하고 우도를 통한 왜구의 침입이 그치지 않아 성읍리로 옮기게 됐다.

 

성읍리는 영주산을 주산으로 동서쪽에 좌보미오름, 장자오름, 도리미오름, 아부오름 등이 있고, 남북으로는 남산봉, 백약이오름, 개오름 등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또 제주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이 마을을 감아도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새로 복원된 건물이 두어채에 불과하지만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는 관아의 다양한 건물이 모두 그려져 있어 정의현의 규모가 적절한 품격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감의 근무처인 일관헌(日觀軒), 향리의 집무청인 향청, 현의 부속건물인 무학청, 진사청, 군관청, 가솔청, 작청, 군기고, 대동고, 평옥고, 형옥 등이 있었다. 또 조정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묵었던 객사인 영주관, 유생들의 구심체인 정의향교와 정자도 세워졌다.



성읍에는 물이 귀하다. 제주도 전역에 흔하게 널려있는 용천수가 이곳에는 없다. 주민들은 천미천의 물을 이용했으나 현감은 전용 우물을 이용했다.

현청 근처에 땅을 파고 주변에 돌을 쌓아 한라산에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고이도록 물통을 만들어놓았다. 주민들은 사용할 수 없었던 "원님물통"은 아직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물이 귀한 성읍에서 정의현 관아의 전용이던 "원님물통"



정의현 관아 주변에는 아직도 1천년 묵은 느티나무를 비롯해 아름드리 나무들이 버티고 서 있다. 정의현성이 세워질 당시 이 일대는 숲을 이루고 있었고, 관아 건물들을 짓는 데 이 일대의 나무들이 목재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이 객사로 이어진다. 조정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남문을 거쳐 곧바로 객사에 들어 짐을 푼 뒤 현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배치돼 있다. 특히 객사인 영주관이 동헌인 일관헌 보다 훨씬 규모가 커 왕권이 강했던 조선 초기 시대상을 보여준다.

"해를 바라본다"는 뜻의 일관헌(日觀軒). 현감의 집무실인 동헌이다.


동헌 보다 규모가 훨씬 큰 객사 영주관(瀛洲關). 본관 좌우로 부속건물이 달려있다.




전국의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모셔져 있었다. 왕의 초상을 대신하는 것으로, "대궐 전"(殿)자가 새겨져 있어 "전패"라고 불렀다. 지방에 출장을 간 관원이나 지방의 수령이 동지, 설, 왕의 생일, 하례의식 등이 있을 때 아래 관원들과 함께 배례했다.

 

왕의 상징인 만큼 매우 엄하게 관리돼 이를 훔치거나 훼손시킨 자는 본인은 물론 일가족을 처형했으며, 그 고을은 혁파되고 수령은 파면됐다.


영주관에도 전패가 모셔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 전국의 객사에 있던 전패가 일제에 의해 모두 불태워졌으나 이곳 성읍에서는 유림들이 전패를 숨겨 온전하게 보존됐다. 현재 제주시 향교에 보관돼 있다.



관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건물이 초가다. 정의현에서 가장 부자이던 조씨 집안 주택의 경우 보기 드물게 안거리, 밖거리, 모커리, 쇠막(외양간), 연자방아간 등 다섯채에 이르는 규모임에도 모두 초가인 점으로 미루어 당시 제주도에서는 기와가 귀한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방아간을 전용으로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수확하는 곡식이 많았다는 것이니 대지주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때 와세다 법대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해방후 제주도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했던 조몽구의 집이다.


성읍 최고의 부자 조씨집. 널찍한 마당에 다섯채의 초가와 뒤꼍에는 넓은 우영밭이 있다.



관아 안에 당이 들어서 있는 것도 특이하다. "관청할망당"이다. 당집 안에 보관돼 있던 목판에는 "세종5년 정의현의 읍지로 설정될 때 초대 현감이 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관과 민이 일치하여 봉안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유교국가이던 조선의 관아에 신당이 세워졌다는 것은 제주도의 민간신앙을 관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설에는 어느 현감의 부인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현감의 꿈에 "할망"이 나타나 당을 지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해 관아 안에 할망당을 모신 뒤 부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은 지역이어서 그런가. 성읍에는 도내에서 두번째로 개신교회가 세워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나 교인은 10여명에 불과하다. 성읍교회는 이기풍 목사에 의해 1908년 도내에서 최초로 성내교회(현 제주성안교회)가 설립된 뒤 곧이어 이듬해인 1909년 이곳에 들어섰다.



제주도에서는 통시에 돼지막이 있고 화장실로 사용하는 곳은 지붕은 없이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야트막하게 돌을 쌓는 것이 보통이다. 차라리 돼지막에는 지붕을 만들어놓지만 사람이 잠깐 들어가 일을 보는 곳에는 지붕이 없다. 그런데 이 마을 통시에는 지붕이 얹혀 있어 성읍의 독특한 취락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성읍만의 점잖은 선비문화의 소산일까?

통시의 단정한 초가지붕이 이곳의 선비문화를 대변하는 듯 하다.







창민요가 남아있는 것도 특이하다. 대정현은 물론 제주목관아가 있던 제주시에서도 사라진 민요가 성읍에는 전해지고 있는 배경이 무엇일까. 강문규 실장은 다른 지역의 경우 신작로가 뚫리고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옛 문물과 풍류가 급속히 사라진 반면, 성읍은 일제강점기 이후 철저히 새로운 문명으로부터 고립돼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다른 객사들처럼 정의현에도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다녀갔다. 그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시를 써 동헌과 객사에 걸어놓기도 하고, 주연을 베풀며 관기들과 어울려 춤과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유독 성읍에 "봉지가" "용천검" "관덕정 앞" "중타령" "사랑가" "계화타령" 등 다른 마을에서는 들을 수 없는 창민요가 남아있다.



"봉지(꽃봉오리)가 진다. 봄철 낭(나무) 아래 봉지가 진다..."(봉지가)

"옛다 요년 돈 받아라. 아기종 걸어서 신(新) 목사 홀리레 나간다..."(계화타령)



해설을 하던 도중 강문규 실장이 불러제낀 노래다. 정의현을 찾았던 관리들과 관기들이 부르던 창민요가 성읍 출신 인사들에게 전승된 것이다.

 

민요만 전승된 것이 아니라 풍류도 함께 전해져 최근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끼리끼리 모여 밤 늦도록 허벅장단과 장구, 북에 맞춰 춤과 노래를 즐기곤 했다는 것이다.

예전의 풍류가 남은 탓에 성읍마을은 한라문화제 최다 출연 마을로 꼽힌다. 성읍 민요를 한데 묶은 "정의고을 들노래"는 전국 민속경연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성읍마을은 1981년 제주도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뒤 1984년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돼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됐고 성곽과 동헌인 일관헌, 객사 등이 복원됐다. 무형문화재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제주민요"가, 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오메기술, 고소리술, 성읍리 초가장 등이 지정됐다.



그러나 복원과정에 문제도 많았다. 복원된 성곽에는 외부에서 성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눈썹처럼 튀어나온 "여장"이나, 성곽 위에서 외부 침입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인 "사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채 겉모습만 복원됐다. 동향으로 지어져야 할 일관헌은 남향으로 앉혔다.

초가는 육지 업체가 복원 사업을 맡는 바람에 육지식으로 복원돼 제주 초가의 원형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100여년 전 마을 초입에서부터 끝까지 길 가에 심어놓은 왕벚나무는 마을 길이 새마을운동 등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이미 잘려나갔다.

복원된 정의현 성곽. 그러나 성이 갖춰야 할 중요한 내용들은 복원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뿐 아니다. 유형의 문화재는 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많은 문제를 안은 상태로나마 일부가 복원됐으나 무형문화재 전승 보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민요나 고소리술 외에 멍석이나 지게, 나무신, 우장 등 목공예 짚풀공예는 제외돼 있다. 뒤늦게 초가짓기 기능을 가진 "초가장"은 문화재로 지정돼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기능의 장인들은 지정되지 않아 맥이 끊길 우려가 높다.


성읍마을 주민들이 새로 이을 초가의 집줄을 놓고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초가장"만 지정돼 있다.



대표적인 제주도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성읍민속마을은 진가를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일부만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성읍이 간직하고 있는 민속문화적 가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 버릴 무형의 문화적 자산들을 잃기 전에 취해야 할 조처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찾아내어 그 가치를 인식하고 잘 다듬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보물들이다.



제주포럼C의 탐방은 애초 성읍의 주산인 영주산을 오르는 것이었으나 구제역 때문에 표선면의 자제 요청으로 계획을 바꿨다. 눈덮인 웃밤오름을 오르고 난 뒤 친환경 녹차농원 "초록모루"를 찾아 따끈한 녹차와 군고구마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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