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 2백년 된 초가집..누가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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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 2백년 된 초가집..누가 살까"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6.1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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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유산답사기(2) 구좌읍 종달리 답사, 따라 가 보니..

 

 김검룡묘에서 답사가 시작됐다

숨어있는 제주도의 보물같은 이야기를 찾아보는 제주문화유산답사..


문화란 무엇일까..
그것도 제주문화란 또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매월 1회 제주도 마을을 골고루 돌며 제주도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답사팀(제주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을 따라 지난 13일(일요일) 이 모임에 두 번째로 참여한 이유는 그런 절박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자꾸 사라져 가는 우리의 제주문화는 지금 위기에 처한 환경문제와도 닮았다.
그런 밀접한 관계이기도 하기에 나는 그들의 발걸음을 빠짐없이 따라갔다.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해설을 했다


이날 찾은 곳은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이미 지난 주 올레1코스를 걸으며 한번 걸었던 곳이기에 그땐 몰랐던 이야기를 듣는 기회여서일까.. 개인적으로도 궁금한 곳이었다.

종달이란 맨 끝에 있는 땅, 또는 종처럼 생긴 지미봉 인근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고영철 회장에 따르면 "종달은 원래 종다릿개라는 포구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주민들은 종다리 또는 종달이라 부른다"고 한다.

반농반어마을인 이곳은 당근과 감자를 많이 재배하고 마늘이 많이 생산되지만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소금을 많이 생산했던 지역이다.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소금밭은 육지에서 소금이 들어오자 그만 두었고 지난 60년대부터는 이 소금밭을 논으로 사용하다가 수익성이 낮아져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최근 개발붐이 불면서 이곳에 하나 둘씩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고 곧 주택이나 상업지로 변할 위기에 처해 있다.

 
 김검룡묘


이날 처음 찾은 곳은 헌마공신으로 알려진 김만일 가문의 경주김씨 입도조인 김검룡묘였다.

해설에 따르면 김검룡은 경순왕의 넷째 왕자 안동군 김은열의 16세손이며 김녕군 김시홍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익화군 김인찬으로 조선개국 일등공신이며 의정부좌찬성의 요직에 있었다.

경주김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중 장자인 김일은 금강산에 입산했고 둘째 김굉은 나주김씨와 안로김씨의 선계가 되었으며 셋째 김명종과 넷째 김은열은 경주김씨의 파조가 되었다.

김검룡의 입도동기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김검룡은 조선초인 정종말기 태종조때 감목사로 입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1402년(태종2년) 양마 6필을 생향인 경기도 양근현 마유봉에 보내어 헌마한 후 같은 해 제주도지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승되는 점으로 미루어 감목사라는 벼슬로 제주와 인연을 맺고 정의현 오조리에 정주한 것으로 보인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는 것.

 이 묘는 40여년전 도굴돼 돌로 무덤을 감싸고 있다


김검룡묘는 왕릉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보통 묘는 벼슬이 높아도 동자석까지만 쓰는데 문인석과 무인석은 물론 석등까지 있는 것은 가세를 높이려고 한 뜻이라는 설명이었다.

"김검룡묘는 문화재로 지정이 돼도 충분한 묘역이지만 중간에 묘지를 변형시켜 문화재 지정이 안됐다"는 아쉬움에 대해 이곳에서 만난 관리인은 "40여년전 도굴을 당한 적이 있어 묘를 보호하기 위해 돌로 묘 주위를 감싸게 됐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 왕릉에 있는 양비(羊碑)는 정면을 바라봐야 하는데 옆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방향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했다.

이 모두가 처음 듣는 얘기처럼 신기했다.

 양천허씨 입도조 허손묘


김검룡묘 답사를 마치고 나와 다음은 양천허씨 입도조묘인 허손의 무덤을 찾았다.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을 조달해준 공으로 허선문이 세거해 온 공암의 공암촌주로 봉해져 그곳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양천허씨를 일명 공암허씨라 함은 이에 연유한다는 것.

허손은 대제학 허흠(이성계가 등극하자 자결했다고 함)의 둘째 아들로 명가에서 태어난 고려말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등극하던 1392년 제주도에 들어왔다고 한다.

다소 높은 동산에 자리잡은 묘의 모양은 원묘로 무덤의 크기가 매우 크고 비석에는 대제학 양천허씨공손 정부인밀양박씨 합지라고 새겨져 있다.

묘와 비석의 크기가 웅장하여 보통 우리가 보아왔던 무덤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도 골총으로 남아있다 허씨집안에서 나중에 찾아 복원한 것이라 해서 더욱 관심이 갔다.

 이 비석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졌다


이어 이영조효자비를 찾았다.
이 비석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져 풍화에 약한 돌성 때문에 지붕을 만들고 벽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효자 이영조는 13세때 그의 어머니 양씨가 난치의 병을 얻자 어린 나이에도 백방으로 약을 찾았지만 효험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가 임종에 이르게 되자 엄지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입에 수혈을 하니 병이 나아 천수를 다했다는 것.

다만 한자로 상지로 표기돼 있어 이 자리에서 상지가 엄지인지 중지인지 회원들간 의견이 분분했다.

“보통은 약지를 잘라 피를 먹이는데 엄지를 잘랐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지는 엄지를 이르기도 하지만 중지를 일컫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지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현장에서 내렸다.

 

고 회장은 “제주도의 비석생산지는 산방산 주변에서 조면암이 많이 생산됐다고 하며 북제주군에는 비석을 생산하는 곳이 없었고 서귀포 하효리와 영락리 등에서 비석을 많이 생산했다”고 전해줬다.

이처럼 종달리는 역사유적이 참 많은 곳이었다.

이 지역 유적 발굴터를 돌아보면서 고 회장은 “종달리는 조개무지(패총)와 각종 청동기시대 칼이나 돌칼이 발견되는 곳이지만 제주도에서는 나올 수 없는 유물로 중국 등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특히 지난 1991년부터 2004년까지 모두 5개 지구에서 발굴조사를 실시, 신석기시대에서 탐라후기에 이르는 시기의 패총, 생활유적 등이 발견돼 제주도내 다른 지역에 비해 점토대 토기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종달리 유물발굴지구

특히 종달리 유적 중 제4지구에서 발견된 항아리는 옹기가 1100도, 도자기가 1200도에서 구워진다는 점에서 800도 정도의 온도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는 설명이덧붙여졌다.

그전의 토기는 보통 600도 정도의 온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단계 높은 유물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종달리 유적에서 발견된 백동단검이나 세형동검 등은 제주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고, 또 다른 발견품인 돌칼 유물도 제주돌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고영철 회장은 "제주시 용담동 지역의 경우는 제사유적터로 구슬 등과 함께 병이나 항아리 등이 발견되지만 거의 중국제품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주도 문화유적이 다 제주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기회였다.

 종달리본향당(모두 이전해 가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종달리는 특히 마을 주변이나 바다 등에 유독 당이 많았다.

하지만 종달리 본향당은 지미봉 남쪽 밭 옆에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거의 폐허로 변해 있었다.

고 회장은 "얼마전에 왔을 때는 2층 제단에 예쁘게 정리돼 있었는데 어디로 옮겨간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이곳은 백주노산주(백주노산국)를 본향신으로 모시며 불당과 유사한 형태의 제단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음으로 가 본 곳은 청강사(절)내에 있는 엉물이었다.

 

 청강사내에 있는 엉물

엉물은 엉덕 아래에서 물이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맥이 끊겨서인지 맑은 물은 보이지 않고 개구리밥만 가득한 버려진 우물터로만 보여 아쉬움을 주었다.

이어 찾은 청강사와 해안도로 사이의 좁은 농로를 따라 조그만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종달리 틀목일궤당은 이 일대를 틀목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7일에 다니는 당이라 틀목일궤장이라 부른다고 한다.

 틀목일궤장


종달리 본향당의 처신이며 피부병을 관장한다는 신이라고...

“왜 다른 곳과 달리 큰나무가 아닌 숲속에 만들었느냐”고 물었더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신이 사는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이어 찾은 종달리 성개납 돈짓당.

해안도로를 따라 하도리쪽으로 가다 보면 바닷가에 홀로 우뚝 솟아오른 괴석이 있는 곳이다.

늘 지나 다니면서 보았던 곳이지만 그동안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궤납 돈짓당


사자가 포효하듯 보이는 이 괴석은 당의 왼쪽에 직경 15cm 정도의 납작한 돌들을 점점 위로 오므라지게 하면서 속이 비게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든 궤가 있었다.

궤속에는 사과 배 귤 등 과일과 물색을 놓는다.

이곳에는 특이하게도 바위틈을 뚫고 올라온 갯쥐똥나무(우묵사스레피나무)가 자라고 있어 신비감을 준다.

이날 모든 과정의 해설을 맡은 고영철 회장은 "당에 보통 걸려있는 붉은색 천은 벽사(사악한 것을 물리침)를 뜻하고 소금은 부정한 것을 내보낸다는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당이 있는 곳을 성개납이라고 하지만 어원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고망(구멍의 제주어)난 돌’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고망(구멍의 제주어)난 돌’이 나타났다.

흐르던 용암이 바다를 만나 급속하게 식으면서 모양이 불규칙하게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곳은 들어가 보니 바다를 향해 구멍이 뚫렸고 하늘을 향해서도 뚫려있는 두 개의 확 트인 구멍이 나 있었다.

고 회장은 “이 고망난 돌 주위에는 지금의 잔디와는 다른 질좋은 잔디가 융단을 깐 것처럼 자라 있어 인근 학교에서의 단골소풍장소였다”고 소개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기암괴석과 고망을 통해 바라보는 바다는 장관이었지만 그 시간 물질을 하는 해녀를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만서여불턱

이어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만서여불턱을 찾았다.

물이 다 빠진 모래사장을 지나 멀리 보이는 곳.
불턱은 불을 피우는 자리를 뜻하는 제주어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던 공간,
이곳은 만사라는 곳으로 그 앞쪽에 있는 여를 만사여로 부르기에 만서여불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고 회장은 “물 아래에 있으면 초, 물 밖에 나와 있으면 여, 여에 나무가 있으면 섬이라고 한다”는 해설을 붙여줬다.

 종달리에서 가장 오래된 강군황 초가

이날 가장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강군황 초가였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종달소금터에 도착하자 점점 세차지기 시작했다.

답사팀은 염전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길을 걸어 동네 안으로 들어섰다.

종달리에서는 가장 오래됐다는 초가집.

고 회장은 “적어도 200년은 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외부는 유리창을 달고 지붕에는 검은 망을 씌웠지만 제주도 초가집의 전형으로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고 소개했다.

 
 이기생 할머니

이 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 이기생 씨(91세) 할머니는 “찾아줘서 너무 고맙다”며 답사팀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자녀는 5남5녀를 두었는데 모두 다 서울로 가 홀로 이 집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이 집이 종달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감귤이 주렁주렁 푸짐하게 열린 마당처럼 할머니의 넓고 좋은 마음은 답사를 끝내는 우리 답사팀의 마음까지 녹여주었다.

 
 

이날 참가한 회원들은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이날 답사를 마무리하는 작은 행사를 이 할머니와 함께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것이 몹시 서운하신 듯 문밖까지 나와 배웅해 주어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초가집을 바라보며 그야말로 제주도 주민들의 삶속 속살을 그대로 만날 수 있었던 그 순간이, 가장 따뜻하고 소중한 제주문화유산 답사의 시간으로 남아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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