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1호 열녀비는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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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1호 열녀비는 어디 있을까.."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6.12.1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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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유산답사회, 한남리 사람들의 아픈 삶의 흔적 찾아내..

 남원읍 한남리에서 바라본 한라산

 

본명보다는 닉네임이 더 친숙한 모임.
그들은 모두 함께 다니면서도 서로의 이름이나 직업을 잘 알지 못한다.

소개할 때도 닉네임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모두 닉네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나타날 어색한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로, 그동안 자연스레 만들어진 답사팀 만의 독특한 문화일 지도 모른다.

이날 답사에 나선 회원들의 닉네임만 해도 사철난, 소나기, 섬아이, 구담, 구룸비, 탐라곰,둘둘,서지니, 자향박, 보라별꽃,훈군태자,지나, 장옥희, 그린리버, 플라톤, 벽하, 김홍식, 윤아, 고명지,제기대 제인, 라임, 숲속길 등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이름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번갈아가며 한번은 해설자로, 또는 관련분야 전문가로 나서기도 했다가 곧 평회원으로 돌아가 문화유산 답사를 이끈다.

이처럼 자주 제주문화유산 답사를  따라 다니다 보면 모르는 부분도 접해가면서 알음알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는 점이 이 모임의 매력포인트다.

개인 신상에 대해 알려고도 굳이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아 모임 참석에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3-4회 정도 이들을 따라 가보면 대강 분위기를 배우게 된다.

누군가는 열심히 설명하고 누군가는 열심히 듣고 적고, 또 누군가는 열심히 따라다닌다.

지난 23년간 꾸준히, 묵묵히 한달에 한번 제주문화답사를 진행해 온 제주문화답사회(회장 고영철)를 지난 10월부터 3개월에 걸쳐 함께 다니면서 배우고 본 느낌의 이야기다.

 고철현 위원장의 하눌타리 사업에 대한 설명부터 답사는 시작됐다

이날 답사에서도 나는 상록수가 왜 상록수인가에 대해 "봄이 돼 새로운 잎이 똑같은 크기로 자랄 때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는 붉가시나무의 예를 들며 상세히 설명해 주신 사철란님의 닉네임을 몰라 구담 님께 물어서 알았고 7대 명당터에 대해서는 섬아이님께 따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차를 탔던 둘둘(아들만 2명) 님이 퇴직한 전직 고교 교사라는 사실과 교환교사로 제주에 왔던 지나님은 2년동안 살다가 내년 2월에 서울로 다시 복귀한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나누는 짧은 대화속에 얻어지는 작은 정보들..

윤아님은 안방살림을 맡은 수고하는 총무님 역할을 맡아 1년동안 고생하셨던 분이고 고영철 회장님과 늘 같은 차를 타고 답사에 나서는 자향박님은  회장님의 제자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알알이 알아가는 답사팀의 면면에 대한 궁금증 내지는 관심같은 것..그걸 하나하나 알아가는 일도 실은 답사에서의 작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이런 참 좋은 분위기속에서 지난 11일에는 남원읍 한남리 지역을 샅샅이 뒤지듯 제주문화유산 답사에 나섰다.

답사를 하다 보니 이곳의 어떤 아름다움은 남 몰래 숨겨두고 싶었고, 어떤 곳의 잊을 수 없는 아픔은 꼭 기억해 두고 싶었다.

한남리는 한라산 남쪽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중산간 농촌마을.
말로는 들었지만 동네를 들어가 본 건 이 날이 처음이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거의 다 감귤농가들이라 마을 주민 모두가 부자라고 한다.

"한남리의 옛이름은 부등지 부등개 등으로 불리웠다고 하는데 이 지역 산에 불이 많이 들어 한자를 차용, 화등지 부등지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도 많지 않은 곳"(고철현 위원장 설명)이라고 하고..

마을의 역사를 들여다 보니 한남리는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이 폐동되어 주민들이 남원리와 의귀리 등에 이주해 살다가 1953년 7월에 재건된 아픔이 많은 마을이었다.

이 한남리에는 거의 현씨 오씨 고씨 등이 많이 살고 있어 3성촌으로 불리운다.

 

산터가 좋아 변호사와 박사가 많이 배출됐다고 하며 이 지역 명승지를 뽑아 지난 2007년 주민설문조사를 통해 한남7경(1경:어우창,2경:거린오름 숙대낭밭, 3경:독데기모루일출, 4경: 숲속의 5,16도로, 5경:당팟 굿놀이. 6경:9소장 잣성, 7경:녹차밭)을 선정했다.

하지만 한남리의 보물은 따로 숨어 있었다.

그중 단연코 1등은 서중천계곡이다.

지질학적으로도 관심이 크다는 서중천계곡은 제주 동남부 주요 하천중 하나로 남원읍지역을 관통하며 흐르는 절경을 자랑하는 계곡이다.

남원리와 태흥리 의귀리 한남리가 서중천 하류주변 마을이지만 한남리에서는 한남천으로, 의귀리에서는 의귀천으로 불린다.

 

총연장은 12.01㎞.
이 지역에 수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 하천의 비령소, 족쟁이소, 허개물 등을 식수로 사용했다는 곳이다.
서중천이라는 이름은  옛 정의현 서중면에 위치한 하천에서 유래 된 하천명이라는 설명(숲속길님 해설)이다.

용암이 흐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양이나 웅장한 계곡의 자태는 돈내코계곡이나 방선문계곡 등 그 어떤 계곡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장엄했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때문인지 원시자연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점이 더 장점이다.

비록 산책로는 계곡을 따라 만들어져 있긴 하지만 아직은 모르는 사람이 많아 숨겨져 있는 비경에 속한다.
어쩌면 중산간지역이라는 특성이 이곳을 자연 그대로 놓아두게 만든 요인도 되었으리라.

 

 

그러나 한남리는 그러한 절경을 자랑하는 곳임에도 옛날에는 팍팍한 삶을 살았던 듯 사라진 마을도 많았다.

머체왓(마체왓) 마을터가 대표적이다.

머체오름옆 마을터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인 돌담과 부엌 등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폐허 그 자체였다.

이곳의 경우 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돌담안에 자라고 있는 나무 정도는 베어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큰 곳이었다.

제주도의 진짜 문화유산은 그런 곳에 숨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4,3의 비극을 전해 주는 동굴이다

이 한남리 지역에는 특히 제주도 국영목장의 역사를 말해주는 9소장 잣성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끌었다.

국영목장을 말하는 1소장부터 10소장까지의 잣성은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목장이 해안가 평야지대를 포함한 섬 전역에 흩어져 있어 농경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말들이 넘지 못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담경계다.

잣성은 세종 11년(1429년) 고득종(영곡공)의 건의에 의해 상호군 박호문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적부를 조사하게 하고 세종 12년(1430년) 2월 도안무사 장우량에 명해 한라산 중턱 165리에 걸쳐 돌담을 쌓기 시작해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설치된 국영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토록 하는 10소장 체제가 갖추어졌고 10소장 위.아래 경계에 돌담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잣(잣담)이다.

잣성은 그 위치에 따라 상잣, 중잣, 하잣으로 나누어지고 한라산 중산간지대를 위 중간 아래로 크게 3등분해서 돌담으로 빙 둘러쌓은 것이다.

▲ 중잣을 알리는 이 글씨는 답사회 숲속길님 작품이다

 잃어버린 마을을 설명한 빌레가름터 표지석
   

가장 먼저 쌓아진 것이 중산간 150-250m 일대의 하잣이고, 18세기부터는 한라산 깊이 들어간 말을 잃어버리거나 얼어죽게 하는 사고를 막기 위해 해발 450-600m일대에 상잣이 축조되었다고 한다.

해발 350-400m 일대에 만들어진 중잣은 상잣과 하잣 사이의 공간을 돌담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이같은 잣성은 남원읍에서는 상중하 잣성을 모두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지역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남리에는 4,3의 아픈 역사가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어 이날 답사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안이곱지궤는 한남천 상류에 있는 으슥한 절벽에 있는 바위동굴이다.

이곳에는 잃어버린 마을 빌레가름에서 생활하던 주민이 이곳으로 피난해와 살다가 몰살된 곳으로 지금도 마을주민들은 이곳에 드나들기를 꺼려한다는 4,3의 아픔을 간직한 천연동굴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넓직한 공간이 있었고 하늘에 유리창을 만든 듯 위쪽으로는 자연창문이 만들어져 빛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빌레가름이란 1948년 11월7일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사라진 마을터를 말한다.

빌레가름에는 이곳의 아픈 역사에 대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25명이 희생됐고 후대가 끊긴 가호도 5호나 됐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역사를 기록한 내용이었다.

표지석에는 "1953년 한남리가 현재의 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재건되면서 남아 있던 1백여명의 주민들은 그 때의 비극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며 빌레가름으로 돌아오지 않고 오늘에 이르러 터만 남게 됐다"는 설명이 쓰여져 있었다.

빌레가름이란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널려있다'는 뜻으로 '잃어버린 빌레가름 마을'이라는 그 제목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이날 해설과 안내를 맡은 섬아이 오명철 선생

또 한곳 한남리에도 화북 조천지역 처럼 비석거리가 있었다.

이날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와 해설을 맡은 섬아이 오명철 선생은 남원2리에 있는 의귀원 비석거리를 안내하며 3명의 목민관에 대한 선정비를 세웠지만 예전 비석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비석이 마모돼 내용이 보이지 않게 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한 중요성을 알지 못해 비석을 토대로 하여 다른 표지석을 세우는데 사용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리사무소앞에 있는 제주도 제1호 열녀비인 고려 정씨 열녀비의 아랫단은 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갖다가 세워놓은 것"이라는 설명을 통해 제주문화 인식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 정씨 열녀비도 원래 귤밭 안에 있던 열녀비를 2006년 한남리사무소로 옮겨와 창고에 보관하다가 리사무소 마당으로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섬아이 님은 "문헌을 통해 확인해 보니 제주의 충효열의 사례는 84명이 확인되고 있고 문헌과 비석이 동일한 것은 40기(43명)와 정려각(효자 박계곤 1명) 등 총 44명으로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서중천의 웅장한 자태

성별로는 남자 35명, 여자 40명이고 남자효자 21기(20명), 충효 4기(6명), 충의 4기(9명) 등 모두 29기(35명)이며 여자는 효열 20기(20명), 열녀 20기(18명), 충의 2기(2명)로 총 42명으로 나타난다는 것.

지역별로는 제주시 50기(51명), 서귀포시 21기(27명)이 소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녀비는 총 20기인데 인원은 18명으로 1인 2기가 2명, 송천향 열녀비(표선면 성읍1리, 교육박물관)와 고씨 열녀비(한경면 고산리, 용수리)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열녀는 정려비 총수 18기, 정려 각 1문(2명) 등 20명으로 파악된다는 것.

이 열녀비와 관련하여 제주에 비석돌 중 특이한 사례가 이곳 한남리 석고리 보개 처 정씨와 애월읍 곽지리 인근 처 김천덕이라고 한다.

 용암이 흐른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정씨는 유일하게 고려때 인물로 공민왕 23년(1374년) 최영 장군의 목호 토벌로 남편이 숨지자 종신토록 절개를 지킨 인물로 문헌으로 전하는 '제주열녀의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 제주 제1호 열녀비

이 제주 제1호 열녀비가 세워진 정씨의 비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해석내용)열녀 정씨의 비이다. 고려때 석곡리 보개의 처이다. 하치의 난에 그의 남편이 죽었다. 정씨는 나이도 젊은데다 자식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안무사의 군관이 억지로 아내로 삼으려 하자 정씨는 죽기를 맹세하고 칼을 뽑아 자결하려 하여 마침내 장가들지 못하였다. 늙도록 재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고 적혀 있다.

비석 후면의 내용은 "(해석내용) 이르는 곳마다 보고 들으며 고적을 중수하였으니 그 은혜 두루 미치고 후사없는 이를 궁휼히 여기셨네. 목사 한공(한응호)께서 특별히 훗날의 양식을 내리어 석비를 고쳐 만들었다. 도광14년(1834, 순조 34) 3월 일"이다.

 머체왓마을터

 숯굴..나중에는 낙인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돼 있으며 이 기록에 따르면 정씨는 조선조 세종 10년(1428년)열녀로 정려돼 이런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 1834년 한남리 1번지에 세워졌고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열녀 정씨 비석'이라 불렀다고 한다고 적혀있다.

답사 도중 중간에 차를 세운 섬아이 님이 "이곳이 한남리 1번지입니다.."하고 몇 번이나 강조했던 그 한남리 1번지에 이 비석이 서 있었다는 얘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한남리 1번지에 제주도 제1호 열녀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정보다.

제주문화답사를 하지 않는 한 이런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제주문화답사 한남리편은 이외에도 마을포제당과 상엿집, 선사유적출토지(대로로 변해 있었음),본향당(당팟), 숯굴(낙인장) 등 매우 긴 시간을 계속 걸으며 탐방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지역을 탐방하면서 헌마공신 김만일의 묘가 있는 반드기왓이 제주7대 명당 중 6대 명당자리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 김만일 일가의 무덤이 있는 제주 6대 명당터 입구

▲ 반드기왓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표현돼 있다

 

한편 이날 답사를 마친 후 제주문화답사회원들은 지난 1년간의 평가회를 가졌다.

23년(275회) 중 처음 10년 동안은 혼자 준비하고 답사를 안내해 온 고영철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제주도 흥사단에서 외부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시민단체라 시민들이 올수 있는 일을 하자고 해서 역사기행을 시작한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며 "광고를 한번 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다녔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데려오고 카페를 만든 후에는 카페를 통해 알리다 보니 특별히 광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밝혔다.

이날 회원들은 올 한해의 제주문화 답사를 평가한 후 2017년 제주문화답사에 대한 새로운 기획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는 자리를 마련, 내년 제주문화답사에 대한 변화와 기대를 갖는 기회를 가졌다.

 

 제주문화유산답사회는 이날 올해의 마지막 답사를 마치고 평가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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