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대하가 바다로 모이듯, 삶의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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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대하가 바다로 모이듯, 삶의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31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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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선(禪)의 직조술- 고은의 '만인보(萬人譜)'이야기

 

고은(髙銀, 본명: 고은태(髙銀泰), 1933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참여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전라북도 옥구 출생으로 호는 파옹(波翁)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1952년 일본 조동종의 군산 동국사에 출가하여 중관학 권위자인 중장혜초로 부터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2005년 이후 여러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 되었으며, 그의 시는 국경을 초월하여 애송되고 있다. 특히 북유럽에서 그의 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을 받았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Cikada)상을 수여하였다. 스웨덴의 한 언론매체 기사에서는 그를 군산의 제왕(Kungen av Kunsan)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고은 시인은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평소 고은의 시를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몇 권 쯤은 읽었을 법한데, 기억에 없으니 나는 그의 애독자는 아닌 셈이다.

그러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이 평양에서 만났다. 그 사건으로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는데, 평양 그 자리에 고은 시인이 동석하여 특유의 감상주의적 감흥에 겨워 역사적 순간에 주인공으로 함께 한 감동의 눈물까지 글썽이며 통일의 시를 낭독하였던 장면이 떠오른다.

2005년쯤인가, 해외 교사들을 위한 초청강연을 청탁한 일이 있었다. 그때 물잔을 따라놓고 술을 마시듯 흉내를 내면서 호방하게 웃던 기억이 난다. 시인은 말을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 보수적인 해외교포들이 많아서 매우 강렬하고 비판적인 그의 강의가 반감도 많이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내가 고은 시인을 만난 전부이다.

그리고 단편적인 그의 책을 한 권 사 보았는데, <개념이 숲>이라고, 2009년 신원문화사에서 간행한 일종의 세상개념에 대한 단상록(잠언록?)이다. 시인의 응축된 사유의 집적물일테지만, 나는 그 책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몇 해전 <만인보>가 완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약 25년동안 연작을 하였다는데, 나는 연작물에 대해서 크게 호응하지 않는다. 연작물은 그 그릇에 갇힘으로서 깊이가 많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노력의 산물로서 알아는 보아야하겠다는 일종의 호기심으로 책을 한 권 펴들었다. 그것이 사단이었다. 나는 도무지 그의 시집을 손에서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놀라웠다. 25년동안의 연작시집이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흘러가는 장강의 물줄기보다 더 우렁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엄청난 등장인물과 자료수집력, 그리고 그것을 시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글의 함축미, 시각의 예리함과 표현의 고졸(高炪)함, 대시인으로서의 진면목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가 왜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만인보(萬人譜)>는 고은이 1980년 여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혐의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 갇혀 자신에게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를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담한 느낌에서 구상하였다고 한다.
고은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때 쪽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그 무덤 같은 방에서 회고와 추억을 해방구로 삼았다. 이 방에서 나가면 만난 사람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시를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 굳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 그러나 그 꿈은 6년이 지난 뒤 시인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뒤 사면, 석방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만인보>의 내용은 가히 대서사적이다. 오천년 역사속 위인들의 일화,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서민들, 불교고승들, 광주민주화운동의 전사들, 현대의 정치적 인물들, 친일파들, 연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의 이름없는 민초들이 겪어온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사를 만들어온 다양한 인군 군상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이른바 <시로 쓴 인물백과사전>으로 총 작품수는 4,001편, 등장 인물은 5,600여 명에 이른다. 평론가 장석주 시인은 이 저작물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장엄한 기획이다. 총 30권에 4001편의 시를 실었는데, 그 시로 5600여명의 인생을 노래한다. <만인보>가 불러일으키는 경이로움은 우선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의 방대함이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욱 언어의 명명력 속에서 5600명의 사람들 하나하나가 생생한 현존으로 되살아나는 기적 때문이다.

<만인보>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큰 포용성, 사람을 향한 따듯한 휴머니티, 구체적인 살과 피로 이루어져 펄떡이는 생명을 향한 예찬, 불행과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관용, 화석화된 굳셈이 아니라 피부를 만지는듯한 그 생명의 부드러운 연민으로 조형된다.

나는 이 기나긴 저작물을 꼭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 언어(한글)의 함축미를 잘 살린 때문이다. 말이 많고 군더더기 화법이 절제된 사유의 응축은, 사람을 깊이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놀라울 정도의 개별 인물들에 대한 씨줄날줄의 정보력이다. 이 성실한 자료의 근거위에서 조합해낸 직조의 기술, 시인은 모름지기 전체의 조망속에서 극히 단면을 추출해 전체를 표현해 내는 최소의 언어, 아니 무언의 언어로 가장 극명하게 갈파해내는 선(禪)의 직조술이 필요하다.

셋째, 시에 녹아든 사상의 관조성이다. 그 바라봄의 미학이 강력하다. 힘이다. 에너지다.

넷째, 개별적인 개개인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인연의 그물코에 모두 연관되어있는 원융화통(圓融和通)으로 거대한 대하를 함께 흐르는 삶의 본질,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실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민족의 대의를 접지 않는 한 총체적 역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이다 세계이다
―「서시」

 

사람은 처음부터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람 속에서 비로소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공간을 함께 아우르는 역사적, 사회적, 상대적 상호 연관의 관계지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개개의 사람이 모여 만든 게 세계인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살아왔으며,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만인보>는 바로 그러한 모습의 숨길 수 없는 개인사와 사회사의 통합적 족보의 문화유산 사슬이다.
나의 족보적 존재를 어떻게 남길 것인지, 나의 묘비명은 어떤 대표적 언어를 각인시킬지, 내 인생은 나의 조각칼과 정으로 돌과 목판에 새기는 일종의 붓걸음이다. 기록이다. 내가 가는 인생은 모두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그것을 얻었다면 <만인보> 30권의 독서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집은 25년간의 사유의 집적이 이루어낸 고도의 응축성으로 돈오돈수적인 기법으로 사람냄새를 단박에 체득할 수 있다. 역사인물과 사건들이 핵심만 추려서 가장 심도깊게 이해되어지는, 일종의 마니차같은 제의(祭意)의 효과를 준다.

<만인보>는 죽은 자도 죽지 않았음을, 산 자도 살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죽은자도 산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한은 살아있고, 산자도 사람속에서 존재감이 없으면 죽어있음을 깨닫게 한다. 현존과 실존의 경계를 체득하게 하는 일종의 도학과도 같다. 하나하나의 삶들이 새로운 해석으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모두의 가슴에 환생하기도 하며, 역사적 공분을 얻으며 시공을 넘는 사회적 존재로 현현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만인보>는 사람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이면서 문화인류학적 답사의 화엄(華嚴)적 만다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심오한 인간의 본질이나, 절대적 가치를 교훈화 시키지 않는다. 그저 존재했던 생래적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투영시키는 행위의 프리즘으로 존재를 들여다보는 생생한 간결함으로 진리의 설득력을 얻는다.

정용주 시인은 논평에서 “무수한 타자들이 살았던 역사 내러티브(historical narrative)의 시간을 문학 내러티브(literary narrative)의 시간으로 바꾸어, 체험으로서의 시간이 이야기된(narrated) 역사로서의 시간으로 전환시켜 <만인보>를 읽으면 그 독서경험 속에서 두 개의 중첩된 시간과 상호소통하며 수용미학적인 시간으로 바꾼다”고 말했다.

즉 지나간 역사의 그 유구함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도 추체험하여 바로 내가 곁에서 함께 겪는듯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닿으려는 핵심적 진실은 인간애다. 인간애로써 소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시인의 참마음이요, 그러한 연민이 살아나고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이들의 진짜 세상을 일으켜 세우는 만인보 25년 여정의 대미일 것이다.

나는 고은 시인에 대해서 판단하고 논평할 인식의 토대나 사적 체험이 없어서 그의 공식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다른 전문가들의 고은 인물평을 몇가지 추출 인용해 보았다.

 

그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고 사귀는 과정에서 언제나 나의 앞에 '경이'로 나타나는 것이 고은이다. 그에게는 도대체 일체의 인용이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자유이고 그저 자기 자신이다. (리영희)

'속수무책(束手無策)'. <만인보>를 받아보고 엽서에 써보낸 소리였다. 그냥 법담 가락의 흉내가 아니었다. <만인보>의 감동이 그의 인간에 대한 기왕의 공감과 겹치며 느낀 심사가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송기숙)

김수영보다 덜 난해하다 뿐이지 그 사상이나 가락 모두 김수영과 통할지언정 서정주로서는 근접할 수 없는 경지이다. (백낙청)

그가 고은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의 현존(現存)의 흔적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은이라는 가면 아래 양각하고 있는 모든 것의 형태와 전설 때문이다. (김현)

실로 절간에 '큰스님'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서정주도 김수영도 되어보지 못한 우리 문단 최초의 '큰시인'이다. 오늘 그의 시가 이르러 있는 높이와 넓이를 만만하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어디를 펼치더라도 거기 살아 숨쉬는 우리말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염무웅)

고은의 상상력, 세계를 투시하는 예감, 화려하고 유창한 문장……. 이것들이 정말 모두 한 사람에게서 태어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여러 개의 귀재가 우글거리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이다. (김병익)

파옹(波翁) 고은선생은 바야흐로 문민정부의 기미가 어렴풋할 무렵에 서둘러서 귀거래하여 강호(江湖)의 주인이 되더니, 세상이 이만치에 이르른 오늘날까지 무릇 시옹(詩翁)의 풍도가 어떤 것인가를 몸소 저렇듯이 본보이고 있다. 파옹은 문단의 토우목마(土牛木馬)와 달라서 그 자체가 문화였다. (이문구)

고은의 전체상을 조망하기에는 문학예술적인 전망대만으로는 어림없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근현대의 문학사적 지평의 시계를 벗어나 민족사적 특수성과 세계사적 보편성을 화엄의 변증법으로 승화시켜 사상운동사적 중력권으로 진입해버린 특이한 문호로 격상해 버렸다. (임헌영)

시인 고은은 아마도 우리 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 붙일 수 없는, 명명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이다. 60년대 이래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문 속의 그는 허무주의의 괴수, 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연이은 자살미수자, 유미주의자, 환속 승려, 청진동의 음산하고도 현란한 스캔들의 극치, 그런 것 속에서 꽃피어난 귀면(鬼面) 바로 그것이었다. (김승희)

좀 더 과감하게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고은 선생은 시의 영매(靈媒)인 것 같다. 선생은 시의 숨결을 영육(靈肉)으로 호흡한다. 그 호흡을 따라잡지 못하는 내게 그것은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다. (성민엽)

고은은 한국시의 귀신 들씌운 보살이다. 넘치고, 풍부하며, 시적 창조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불교적 인식론자와 열정적인 정치적 자유론자와 박물학자를 결합하는 장대한 시인이다. (알렌 긴즈버그)

고은은 직관의 가장 높은 봉오리에 도달했다. (로렌스 펠렝게티)

고은의 시들은 놀라운 시들이다. 그것들은 한국의 짧은 이야기들이다. 어떤 것들은 비문처럼 간결해서, 리 리버의 아름다운 공동묘지를 상기시킨다. 한국의 그림들이다. 아니, 그보다, 글이니까, 수천 개의 인생을 시 속에 새겨서 보여주는 에크프라시스(그림을 묘사한 글)들이다. 짧은 이야기, 또는 초상화, 그리고 끝을 장식하는 지혜로운 어구들, 라 퐁텐느의 우화가 창작된 시절에 '교훈'이라고 불렀을 결구들. 그의 조국의 사람들이 한 명씩, 열 명씩 (수천 명씩) 나타나서, 이들을 따라 조국의 역사도 함께 그려진다. (미쉘 드기)

요컨대 고은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의 목격자일 뿐만 아니라 배우이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시대의 화신(化身)이며, 현대 한국의 억누를 수 없는 탄성(彈性)의 특징을 갖고 있는 고난과 희망의 표현이다. 그의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바람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묻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묻고 또 물어라. 그러면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 발꿈치에 미풍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게리 가크)


고은 시인의 연보를 그의 사이트에서 발췌 인용하여 옮긴다. 특이하게도 그는 그의 전생(前生)까지 연보에 삽입해 놓았다. 윤회와 전생(轉生)을 인정하는 불교적 입장이자, 그의 존재에 대한 연속성, 혹은 선정 가운데서 알게 된 연기(緣起)의 숙명적 진지함으로 받아들인다.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으로 출생. 한때 디오니소스의 친구.
BC 1125 카스피 해안에서 암말로 출생.
BC 0017 시베리아 예니세이 유역에서 인간으로 출생, 아기 무당.

1302 장소 미상(未詳)의 술집 주모.
1422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출생. 주로 행상.
1597 내몽고 출생, 목동.
1634 조선 삼지연 출생, 화전민 피리를 불었다.
1689 조선 추풍령 출생, 일자무식 나무꾼.
1770 여수 돌산도 출생, 무사승(無師僧).
1847 안면도 출생, 귀머거리 머슴. 술을 너무 좋아했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무 시에 집착하나? 하기야 시와의 결별 바로 옆에서 내 시는 실재하기 때문에 내 집착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도 속한다.'

1933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은태(銀泰)였으나 1950년의 6·25 전쟁 중에 이름의 끝자는 떼어내고 은(銀)이라고 자칭한 이래 오늘에 이르렀다. 9세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의 서당을 전전하며. 백수문(白首文)부터 동몽선습, 소학, 논어 등을 익혔다. 어려서 마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로부터 <언문>을 배웠으므로 탄금대인(彈琴台人)의《의지할 곳 업난 청춘》을 주룩주룩 읽다가 종조부한테 혼나기도 했고, 신식 연애소설 따위를 마을 아저씨들을 통해서 빌려다가 탐독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특히 반탁(反託) 동맹휴학, 단정(單政)반대 동맹 휴학을 즐기고, 새벽에 상급생의 지시에 의한 벽보 붙이기 심부름 등에 참가했다.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인 항해사가 건져 내기도 했고, 1952년에 불교 승려가 되어 효봉(曉峰)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수선(修禪)과 만행(萬行)을 하였다.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 수제자가 되어 거지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구걸 행각에 한동안 몰입하였다. 이후 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교무 및 주지 대리 등을 역임하였고, <불교신문>을 이행원(崇山)과 함께 창간, 초대 주필이 되고 그 신문에 논설, 시문 등을 발표했다.
1958년 시 <폐결핵>을 친구인 나병재(羅丙哉)가 투고해서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면서 시단에 나왔다. 비가 오면 조계사 마당에서 벌거숭이로 뛰놀았는데 그럴 때는 다른 승려들도 벌거숭이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1962년 환속하였고, 숄로호프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동안 써둔 원고들을 불질러 버리고 절망에 빠졌고, 5년동안 가짜 고은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었다.
1963~66까지 제주도에 머물렀으며 제주해협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1967년에 서울로 올라와 1969년 잠시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유일한 직장생활을 하였으나 외신기자 구락부 살롱을 취중 난동으로 파손시켜서 그 일로 바로 사직하고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970년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정릉 골짜기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어 만 30시간 만에 의식을 회복하였고, 장기간 치료 및 휴양을 하였다.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자결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이른바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되었다. 박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의 첫 단계인 개헌청원 운동에 문인대표로 참가. 백낙청 등과 동반하기 시작하였고, 세칭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의 김지하 석방운동도 개시하였다.
1974년무렵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하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이시영, 송기원, 조태일, 황석영, 신경림, 장용학, 등과 결성, 초대 대표간사로 활약하였고, 제1차 선언문 발표와 데모 중 체포되었으며,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문인대표로 김병걸, 백낙청 등과 참가하였다.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였고,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결성, 부위원장으로 석방운동도 활발히 하였다. 이우정 등과 동일방직사건에 대한 대책위원회, 상고사 대책위, 원풍모방 대책위, 전태일과 청계피복사태 문제 등에 참가하여 노동 운동에 입문하였다.
1978년 <민주청년협의회>를 화곡동 자택에서 결성, 윤보선, 문익환, 박형규, 성내운, 천관우, 송건호, 백기완 등과 고문이 되었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결성,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함세웅, 박형규, 이우정 등과 함께 참여, 문익환, 함세웅과 함께 중앙상임위 부위원장으로 핵심 역할을 하였다.
1980년 내란음모죄, 계엄법, 계엄교사 죄목으로 조사, 재판.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등과 육군교도소에 구속되었고,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을 체험하였으며. 군법회의에서 20년을 선고 받기도 하였다.
1982년 8·15기념으로 가석방되었고, 이듬해 이상화와 결혼하였다. 1984년 김재준, 함석헌, 안병무, 박형규 등과 민통련을 결성했으며, 1985년에 딸 차령이 태어났다. 만52세에 쉰둥이를 본 셈이다.
1986년부터 <만인보(萬人譜)>를《세계의 문학》에 처음 연재하였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박형규, 김승훈, 이돈명 등과)였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해체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를 창립, 회장은 김정한이고 백낙청과 함께 부회장이 되었다.
1988년 제3회 '만해문학상' 을 수상하였다. 1989년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에 피선, 남북작가회담을 제안하고, 판문점 회담을 위해서 회담 대표와 동료들이 가다가 연행 되었다. 같은 해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창립, 초대 공동의장에 피선되었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1년에 민예총 의장을 연임한 뒤 사임하였으며, 이후 문학 저술활동에 몰두 하였다.
2000년 김대중대통령 재임시 분단 55년 휴전 50년 만의 남북공존을 세계에 선포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의 일원으로 방북하여 기념만찬장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낭독하였다. 이후에는 그의 기존의 업적을 바탕으로 수많은 외국의 문학행사에 초청되어 활발한 국제교류와 문학적 포교에 종사한다.
그리고 2010년 『만인보』의 마지막 4권을 출간하면서 1980년 감옥에서 구상한지 30년, 집필 을 시작한지 24년 만에 총 30권에 5600명의 이름을 올리면서 4001명을 노래한 대하 인물시집을 완성하였다.

 

그는 연보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그 대답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길 44년을 나는 어설픈 농부였고 새였고 울음인가 하였다. 그러는 동안 말이 종교였다. 시가 오지 않으면 흙을 팠다. 흙 속에 시의 넋이 더러 묻혀 있다가 내 몸에 떨며 들어왔다. 바람 부는 날 잔터럭이 일어나며 나는 이내 가지 끝을 차고 날아올랐다. 공중에 시가 여럿이 떠 있었다. 스치다가 한 둘은 우연히 쪼아 먹었다. 자주 미쳤다. 운다. 울음이나 졸졸 가는 도랑물이나 강물 그리고 천년 절벽 때리는 파도기둥이나 다 한 집안이다. 흰 포말의 춤, 시가 거기에 함께 있더라. 세상을 좀 넓히련다. 훨훨! 이승에만 갇혀 있지 않으련다.


고은 시인의 기이한 행적은 어쩌면 세상에 던져진 한 인간의 치열한 자기물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수많은 시와 소설과 수필 등에서 그 몸부림을 느낀다. 무조건적인 찬양으로 그의 업적을 신격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섬섬옥수 적어낸 글 속에서 그의 생각과 그의 구도적 수행과 역사에 대해 맨 살을 부비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한 실천적 문인의 간난(艱難)한 인생여정은 반면교사로 시사하는 것이 많을 것이다.

고은 시인도 52세에 딸을 얻었다. 나는 네가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 대목에서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창작의지에 대한 추동적 에너지를 감돌게 한다.
너도 고은의 굴곡 많고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많은 배움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도도한 운명의 흐름이 네 인생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기나 긴 밤들을 나는 <창박과비평>에서 2010년 개정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전30권을 읽었다. 누군가 잠 못 들고 긴 한숨의 호흡으로 써내려간 25년간 각고의 창작물을 추운 날 매화꽃 그늘에서 주유하듯이 가로등과 저녁노을을 형설삼아 읽으면서, 나도 그의 만인보의 도도한 한 흐름에 끼어들었다는 착각이 이입되어 흥분을 잠재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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