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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발행인편지/담담한 환경이야기
"돌탑을 쌓은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제주문화유산답사기)대정-안덕지역 방사탑에 숨은 비밀이야기
고현준 기자  |  kohj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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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02.15  10: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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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내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돌탑(방사탑)에 담긴 그 간절한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제주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의 제277차 정기답사는 그런 물음에서부터 시작됐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방사탑 또는 거욱대라는 부르는 돌탑..


지난 2월12일 이날 답사코스인 대정,안덕지역 방사탑을 돌아보며 느껴진 감상은 이 돌탑의 다양한 생김새와 함께 평안의 기원을 담은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돌탑의 모양도 다양해 어떤 곳은 돌하르방이 앉아 있고 어떤 곳에는 남근석이 우뚝 서 있었다.
이 돌탑이 주는 의미와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염원은 또 무엇일까.


이는 전통적 비보풍수로 자연의 지기가 허약하거나 풍수적인 결함이 있어 이를 비보하여 부족한 지기를 바꾸어 자력회복을 통해 편안하고 안전한 땅으로 바꾸어 사는 방법을 찾았던 데서 비롯됐다.

즉, 자연과의 조화로 인간의 삶의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의 경우 이같은 비보방식 또한 다양하여 마을의 안녕을 위해 탑만 세운 것이 아니라 나무를 심어 가리기도 하고 화체를 막기 위해 연못과 우물을 팠고 성을 쌓기도 했다.

드물게는 마을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아예 마을을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했던 선조들의 숨은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명월리의 팽나무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냇가의 팽나무를 보호해 왔던 것이고 상가리의 경우는 나무를 심어 서쪽의 액을 막았다고 한다.

오라동 연미마을은 남조봉의 화각이 비추고 있어 화재가 많으니 못을 파서 막으면 동네가 편안할 것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마을사람 모두가 힘을 합쳐 큰 연못을 파게 됐고 그 후로는 화재도 없고 마을이 편안하게 됐다고 하며 연못이 크고 깨끗하여 연미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이름을 바꾼 곳으로는 구좌읍 한동리가 꼽힌다.

가장 일찍 개벽되었다는 뜻에서 괴이리라고 했는데 계속 화재가 발생하자 결국 불을 끄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한수의 한자에 한라산의 동쪽마을이라는 의미로 한동리라 했다.

이렇게 제주도의 방사용 돌탑은 다양한 이름과 함께 다양한 이유와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방사탑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보편적으로는 답, 탑, 거욱, 답다니,까마귀 등으로 불리워졌는데, 학술적으로 통일된 이름으로 기록 정리하는 과정에서 방사탑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방사탑을 언제, 왜 쌓게 되었는지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잘 모른다고 한다.

다만 마을의 어떤 재앙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 탑을 모시게 된 유래라는 설명.

방사탑의 기원에 대한 채록에 따르면 제주도의 방사탑은 대부분 1900년대 초반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해방전후까지 처음 쌓았다는 얘기다.

쌓는 방법도 특별한 의식이 필요했다.

방사탑 축조는 땅을 파서 솥과 밥주걱을 묻은 후 흙을 덮는 일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다음 순서인 첫 돌을 놓는 작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방사탑을 세우는 목적이 나쁜 기운을 차단하는 것이기에 자칫 그곳에 비친 살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에 통상 마을의 최고 연장자가 나서서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며 기꺼이 첫 돌을 놓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방사탑은 단순하게 돌로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상존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외부에서 침입하여 마을의 평화와 질서를 깨는 사악한 존재에 대한 경고이며 응징의 의지를 천명하는 공동체의 단호한 결의의 상징이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방사탑은 모두 17개소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5년 현재 21개 마을에서 38기에 불과하며 35기의 돌탑이 현존하고 4기의 돌탑은 멸실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난 2016년 1월 현재 50개 마을에 70기의 방사용 돌탑이 있고 제 용도가 잊혀지고 소외되어 허물어져 가는 것도 있지만 마을의 보전과 복원 노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돌탑에 성담, 석상까지 포함시키면 모두 85기가 남아있다는 분석이다.

이날 제주문화유산답사에 대한 해설은 소나기 백민자 선생이 맡아 이같은 설화같은 방사탑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신도2리 방사탑이다.


대정읍 신도리의 옛이름은 도원이다.


이 지역은 논깍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논깍 또는 농깍이란 논밭의 끝에 설촌된 논깍이 농깍으로 음운이 변화된 것이며 소규모 포구가 있지만 풋마늘과 겨울감자가 주 소득원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서쪽이 허하다고 하여 마을아랫부분, 즉 바닷가에 탑이 2기 있었다(제주거욱대).

신도리탑은 지난 2004년 대정읍 문화예술과에서 마을문화재 복원사업에 의해 복원했다.
두 탑의 직선거리는 650미터로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2.4미터 규모의 원통형으로 쌓았고 상단부에는 돌하르방 모양의 석상을 올려놓았다.


남쪽 도구리알 해안에 있는 탑은 높이가 2미터 정도로 북쪽탑보다 작으며 위의 돌하르방은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다음에 찾은 곳은 4기의 탑이 연달아 놓여있는 무릉리 방사탑이었다.


무릉리는 선조8년(1575년)부터 마을이름을 구목리라 부르다가 효종5년(1654년) 현 신도리가 옛이름인 둔포리란 마을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도원리로 개칭하게 되자 이웃마을인 무릉도 마을주민들이 논의, 이름을 고치기로 하고 옛 고사에 나오는 선경처인 무릉도원의 머리글자를 따서 무릉리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 방사탑은 무릉리 중동의 동,남,북쪽은 구릉으로 감싸는 형태이고 서쪽은 훤히 트여 넓은 경작지와 바다가 이어지는 곳이다.


이 풍료롭고 아름다운 지역이 풍수지리적으로는 허한 곳이라 전해진다.
마을이 한쪽이 허하면 모든 잡귀나 액이 들어오는 길목이 된다고 생각하여 방사탑을 쌓은 것이다.


탑속에는 방사용으로 가마솥을 묻었는데 솥은 예로부터 없앤다는 뜻을 의미하므로 재액을 태워 없앤다는 뜻(대정읍지)이다.

 
   
 

다음 찾아본 곳은 대정읍 상모리 우체국 앞에 있는 상모리 극대(석상).

돌하르방과 유사하게 보이는 이 석상은 마을의 기를 지키는 수호신(또는 경계석)으로 '극대' 또는 '돌하르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석상은 상모리와 하모리의 경계에 세워져 미곤방(서남방)을 막아 마을을 보호하는 주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장승(박용후(1989), 모슬포)이라는 해석이다.


이 석상은 전체 높이 178센티미터로 훌쪽한 키의 사람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이 석상은 아직까지 조사된 돌하르방, 거욱, 동자석 등의 제주도 석상들 중에서 유일한 형태다.

이날 소나기님의 해설에 따르면 "이 석상은 옛날부터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때 쓰러지거나 방치돼 버려졌던 것을 뒤에 1기의 석상 머리 부분만 나돌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누군가가 머리 부분을 통통한 자연석 현무암에 올려놓았었는데..몸통은 1971년까지 근처에서 훼손되어 흙에 묻혀 있던 것을 모슬포우체국 건물신축 관계자들이 씻어 세워놓았다는 것.


머리가 없는 이 석상은 20년가까이 서 있었고 지난 1990년 5월 자연석에 놓여 있던 머리부분과 몸통부분을 맞춰본 결과 같은 것임이 확인되어 복원했다.

파란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석상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제 모습을 찾은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 답사팀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인성리 방사탑 4기였다.
이 지역 방사탑은 4개 중 2기(1-2호)는 문화재로 지정, 복원됐지만 원형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인성리에는 또 남문앞못 , 남문못이라 물리는 곳 또한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대정현성을 축조할 당시(태종18년,1418년)에 지나던 노승이 사방을 살피더니 축성감독에게 그대로 작업을 하면 백성들의 피해가 많겠다며 길을 재촉했는데, 감독이 즉시 현감에게 이를 고하자 노승은 서남쪽에 있는 산(모슬봉)이 화기가 비치니 남문 앞에 연못을 파서 화기를 누르면 백성들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


현감은 즉시 축성작업을 중지시키고 연못을 판 후 축성을 하니 축성을 마칠 때까지 마을에 아무런 재앙없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해설을 맡은 소나기 백민자 선생

 
   
 
   
 
 
 

     
 

다음 찾은 곳은 제주도에 유일하게 남근석을 올린 덕수리방사탑이다.


덕수리는 설촌 초기부터 농기구의 일종인 '보습'을 제작하는 토불미, 혹은 창탁불미가 부업형태로 발전하여 주민의 생활근간이 되었다.


이렇게 방앗돌굴리는 노래는 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는 등 지금도 민속이 잘 전승, 보전되는 곳이다.


이 방앗돌굴리는 노래, 불무공예가 제주도무형문화재 9호 및 7호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는 것.
덕수리는 동동, 서동, 도련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동동(큰가름)에만 남자들이 8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2002년 동동 사람들이 모여 가구당 모금을 하여 다시 방사탑을 쌓으니 그후에는 아직 큰 일이 없다고 한다.


또 탑을 쌓을 때는 출력이라 하여 집집마다 성인남녀 한 두 사람씩 참여하여 마을사람들 모두가 돌 한덩어리씩 쌓아가면서 공동의 기원을 담아내면서 쌓았다는 곳이다.

이날 마지막으로 찾은 무반석과 유반석은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한 곳이었다.
얼마전 올레9코스인 대평포구를 따라 박수기정을 거쳐 월라봉으로 가는 길에 놓여있었던 독수리바위(필자가 썼던 표현)의 비밀(?)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무반석과 유반성의 전설

안덕면 화순리는 동·서로 동네가 나눠져 있다. 신작로 서편은 섯동네, 동편은 동동네라고 한다. 동동네 동쪽 냇가 높은 언덕에는 유반석(儒班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고, 섯동네 서쪽 썩은다리 언덕에는 무반석(武班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이 같은 이름은 동·서 동네 사람들의 신분에서 비롯되었다.


옛날부터 동동네에는 이름 있는 양반들이 살았고, 섯동네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살았다. 동동네 사람들은 학식이 높고 지혜가 있었으나 섯동네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대신 힘들이 장사여서 항상 동동네 사람들이 섯동네 사람들에게 기가 죽어지냈다.


어느 날 육지에서 어떤 신안(神眼:地術 또는 相術에 정통한 사람의 눈)을 가진 이가 화순리에 들리게 되었다. 그는 동동네에 머물면서 동동네 유반들이 섯동네 무반들에게 몰리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같은 사실이 궁금해진 이 사람이 그 원인을 알아냈다.

어느 날 밤에 동동네 냇가의 큰 바위와 섯동네 썩은다리의 바위가 불빛을 뿜는 것을 본 것이다.

이는 유반석과 무반석에서 발하는 정기로 무반석의 불빛은 환한데 유반석의 불빛은 반딧불 같으니, 정기 싸움에서 지는 것이었다.

신안 가진 이가 이 같은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말해 줬다. 그러자 유반들이 무반석을 쓰러뜨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유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무반의 힘을 꾀로써 이용하기로 모의했다.

   
 

얼마 후 동네에 상이 났다. 장사를 마치고 동동네 유반들이 계획대로 섯동네 무반들을 치켜세우며 술을 권했다. 무반들이 기분이 좋아질 무렵, 유반들이 무반석을 가리키며 은근히 힘자랑을 하도록 부추겼다.

그러자 무반들이 서로 무반석을 밀기 시작해서 무반석이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 청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갔다.

이튿날부터 섯동네에서 장사들이 하나 둘 죽기 시작해 무반의 세력이 약해졌다. 그제야 무반들이 유반의 꾀에 넘어간 것을 알고 유반석을 없애기 위해 유반석으로 몰려 왔다.

그러나 이미 무반석의 정기가 없어져 바위를 넘어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반석에는 예전에 떠밀 때 들린대로 한쪽 밑굽이 들려져 있고, 거기에 받침돌까지 받쳐져 있다. 그 후로 동동네 사람들이 세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마을 사이의 세력 다툼과 관련된 풍수단맥설화라고 할 수 있다. 무반석과 유반석은 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이날 제주문화유산 답사팀은 월라봉입구 황게천옆 주차장에 차 8대를 모두 세우고 이 유반석(독수리바위)을 보기 위해 43명 전원이 줄을 지어 올라갔다.

절벽 위에 우뚝 홀로 서 있는 이 바위는 이날 다시 봐도 뭔가 사연을 담고 있는 듯 웅장했다.

이 절벽같은 바위곁을 넘나들며 답사팀은 단체 기념사진을 찍어 답사를 마무리했다.

이 길을 올라가면서 고영철 회장에게 "거욱대의 거욱은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고 회장은 "거욱은 악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거왁 또는 거액이라고도 한다"며 "거액(拒厄)이 어원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를 증빙할  문서는 없다"고 설명해 줬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모두 동그랗게 모여 마무리를 하는 시간에는 이날 해설을 맡은 소나기 백민자 선생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서울에서 내려와 제주흥사단 모임에 처음 참석한 류종열 흥사단 이사장은 "본인은 역사를 전공했는데 사방탑(방사탑)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봤다"며 참석한 모두에게 웃음을 주며 이날 제주문화유산답사의 의미를 전했다.

답사를 모두 마치고 소나기 님에게 "왜 닉네임이 소나기냐"고 물었더니.."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의 그 소녀의 감성이 너무 좋아 소나기로 지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날 답사는 평소 30여명이 다니던 인원보다 훨씬 많은 43명이 참가했다. 이 참석인원은 제주문화유산답사회 역사상 두번째 많은 숫자라고 했다.

제주흥사단 김용호 대표와 김승범 사무총장 등 제주흥사단에서 10여명이 함께 참여, 문화유산 답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제주문화유산 답사는 답사의 의미보다도 제주민들의 삶의 흔적을 찾아가 그들의 정신을 배운다는 뜻이 크다.

이 제주문화유산이야 말로 오늘의 제주도를 있게 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문화에 대한 의미를 너무 모르고 살고 있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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