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나라사랑 실천한 한 도덕운동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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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나라사랑 실천한 한 도덕운동가의 삶..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2.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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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보편적 인류애의 인도주의자- 서영훈 선생

 

 서재에서 서영훈 선생

서영훈 선생님은 1923년 평남 덕천의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선생님은 일제 시대에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했던 조부의 사회봉사 활동과 창씨 개명을 끝까지 거부했고 공산주의를 비판하다가 6·25때 공산당에 의해 사망한 부친의 항일 정신과 비타협을 보며 자랐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문학 서적들과 함께 톨스토이와 간디의 작품에 몰두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서영훈 선생은 인도주의자, 현실 개혁가, 종교인의 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선생은 사회와 인류에 대한 큰 뜻을 품고 17세에 고향을 떠나 한때는 묘향산 내원암(금강방장)에도 있었고, 영변에서 사립학교 교사 노릇을 했으며, 19세에 YMCA에서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행을 결심했으나 건강이 나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는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우연히 당시 금서로 되어 있던 이광수의 󰡔흙󰡕을 나누어 읽은 것이 발단이 되어 평소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일경에 체포되어 중국행을 시도한 배후를 크게 의심받아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되던 날 하루 전에 감옥에서 서 선생님은 이적체험을 하셨다고 한다. 커다란 종소리가 울리며 허공에서 말소리가 들렸는데, “이제 광명이 오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해방이 되어 풀려나셨으니, 이를 두고 기독교인으로서 영적인 계시에 의한 체험으로 평생 알고 사셨다.

해방 1년 후 월남한 그는 광복군 출신들이 조직한 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직원이 되어 그곳에서 철기 이범석 장군과 장준하 선생 등을 만나고, 그곳에 자주 강의하러 오던 백범, 소앙, 위당, 소오 등 당대의 지도자들을 자주 접촉하면서 감화를 받는다. 그러나 선생이 가장 깊은 영향을 받은 이는 함석헌 선생과 류영모 선생인 것 같고, 직접 만나진 못했어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정신과 높은 인격을 흠모한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의 이력서에 나타난 학력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서울신문학원(51년)과 국제 대학 교육과(56년)의 졸업이 그의 정규 학교 교육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해박한 지식, 현실 개혁에 대한 강력한 의지, 한번 시작하면 청산유수와도 같은 언변은 모두 차가운 현실과의 구체적인 접촉에서 얻은 것이다. 

 1974년 남북적십자회담

 

 1977년 뉴델리에서

서영훈 선생님의 이상주의적 인도주의를 완성시킨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는 그가 1953년 청소년부장 서리로 들어가서 1982년지 사무총장으로 근무한 대한적십자사를 들 수 있다. 선생은 거의 30년 동안 적십자사를 통해 53년 부산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일부터 72년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남을 돕는 일’이며 이런 도움은 구체적으로 적십자사의 구호인 ‘박애·봉사·친선·보건’이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특히 선생은 72년에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표어를 직접 만들어 환경보호 운동에 앞장을 섰으며, 당시 성행하던 매혈 제도를 폐지하고 자진 헌혈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가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인들의 저지를 물리치고 혈액과 의약품을 직접 광주로 가지고 가서 공급하고, 필요한 산소를 위해 밤새도록 폭우 속에서 서울로 달려와 산소를 공급하도록 하는 헌신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정신도 모두 적십자 정신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생은 영원한 적십자인이다.

서영훈 선생님은 82년 적십자사 사무총장직을 퇴임하고 83년 1월 흥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시민성 함양과 함께 현실 문제에 눈을 뜨게 된다. 원래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신민회(1907년)와 그 산하 단체인 청년학우회(1909년)를 뿌리로 우리나라 8도 대표가 1913년 5월 13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다. 선생님은 20대 초반부터 55세에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태극서관, 신민회, 흥사단, 상해임시정부 등을 조직하고 지도한 도산의 사상을 '숲이 깊으면 둥지가 많다'는 수상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도산과 같이 위대한 인물의 정신과 사상을 간단히 표현해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우나 쉽게 요약하면 “참되자, 일하자, 사랑하자”는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진실 정신을 인생의 기본으로 강조하고 실천했다. 거짓말과 허위의 행동이 개인과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무슨 일에나 신용이 있어야 남과 협동할 수 있고 큰일을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근면 역행의 생활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그는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에도 혁명을 생각하고 독립을 획책한다”고 말했다. 정성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도둑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셋째로 그는 서로 사랑하고 단결하라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그는 동포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조국강산과 자연을 강렬히 사랑한 숭고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그는 정의돈수(情誼敦修)와 신성단결(神聖團結)을 역설하면서 단체 활동과 애국 운동을 실천했다.실제로 서영훈 선생님도 적십자 운동과 흥사단 활동을 자신의 생애의 ‘양대 축’이라고 말한다. 적십자의 인도적인 이상과 흥사단의 현실적인 개혁, 그것이 본인의 삶을 형성했다는 뜻이겠다.

 

어린이날을 맞아

 

평양에서 손정도목사 국제학술대회를 마치고

그러나 서영훈 선생님은 이상의 두 개의 축 이외에 또 하나의 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생께서 평소에 “나는 네루를 존경하지만 간디를 더욱 존경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종교적·도덕적 측면이다. 선생은 분명히 인류를 사랑하고 현실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큰 뜻을 가진 사람은 일종의 종교적인 소명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간디가 비폭력을 진실로 실천하려는 사람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했던 것과 같다.

선생은 인도주의자며 현실 개혁가다. 그러나 선생은 먼저 종교인이다. 그래서 선생은 법보다는 법의 정신을 더욱 중요시하고, 법가보다는 도가를 더욱 사랑하고, 인륜보다는 천륜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정치보다는 정치가 잘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덕 회복 운동과 인간성 회복 운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상상적인 대화체를 구성해 본다. 

“선생님은 기독교인이십니까?”

“네, 초동교회 장로니까 당연히 기독교인이지요.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입니다. 그러므로 본 바탕은 유교적이지요. 거기에다가 동학 사상이나 도산 사상과 같은 한국적인 전통과 간디와 톨스토이가 주장한 비폭력 사상까지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종합적인 신앙은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기독교 사상에 위배되지는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는 이상에서 열거한 종교 이외에도 노자, 류영모, 함석헌 같은 분들의 사상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는 민족종교연합회의 초청을 받아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강연의 반응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굉장히 좋았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하나의 종교’와 ‘여러 종교’의 갈등을 선생님 자신의 독특한 종합적인 종교성으로 해결하셨군요.”

“그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평소에 국무총리가 못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신다는 데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사회공동선운동 같은 일입니다. 진정한 시민운동, 전국민의 성격 개조와 인간성 회복 운동, 민간인 차원의 봉사 활동 등이지요. 한 마디로 새로운 도덕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덕 운동보다는 정치 운동이―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는―더욱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도덕 운동이 없는 토양에서 정치 운동은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내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유도,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도덕 운동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른 보기에 도덕 운동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없이는 어떤 운동도 실효를 거둘 수 없습니다.”

 

김수환추기경 방문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축하식

  

훈장 서훈

 

김종필 총재와 함께

  

서영훈 선생님이 '평화의 도정' 이후 펴낸 '숲이 깊으면 둥지가 많다'는 책을 펴냈다.

원래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봉황이 높은 뫼에 올라 한번 큰소리로 울기만 하면 어지럽던 난세가 삽시간에 태평 성대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 나오는 봉황은 치난(治亂)을 밝혀주고 흥망을 가늠하는 성인을 상징하며, ‘이 겨레와 온 국민(씨알)들의 뜻과 바램과 정근(情根)을 모태로 하여 민주화의 진통을 겪고 태어날 새역사의 아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서영훈 선생은 봉황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지 ‘숲 변두리의 한 언덕을 골라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벽오동 몇 그루를 심어 저 영조(靈鳥)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위대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 요한과 같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봉황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며, 정작 봉황이 깃들 수 있는 숲을 가꾸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는 결국 사공이 많은 배의 신세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서영훈 선생을 따르는 후학들 중에는 그를 봉황으로 모시려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강원룡 목사님은 출판기념회 축사에서 저자가 바로 봉황이 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청렴결백한 원로로 존경받고 있는 저자가 단지 ‘오동나무를 심는 일’로 만족하겠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원로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나라사랑 원로모임.

서영훈 선생님은 94세를 일기로 지난 2월 4일 소천하셨다. 그 분의 족적은 분단의 현대사에 우뚝 선 거목으로 많은 감화와 업적을 남겼다. 내게 좋은 글을 쓰라며 만년필을 주셨던 일과, 몇 번 섭섭했던 일로 간곡한 당부의 편지를 보내셨던 일, 함께 여행했던 교토와 오사카, 제주도와 동해여행이 생각난다. 많은 애정을 주셨는데, 정작 나는 먼 발치에서 장례식도 참관하지 못했다.

이제는 고단했던 한 세기의 삶을 마감하고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먼 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지하에서도 편히 잠들지는 못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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