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효열 찬양..회천동 이행숙처김씨효열비(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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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효열 찬양..회천동 이행숙처김씨효열비(파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2.2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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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100세 넘은 시아버지 병든 남편 봉양'

 

회천동 이행숙처김씨효열비(파손)


서회천 한량이행숙처김씨효열비
위치 ; 제주시 회천동 2177-3번지. 가는새마을 동쪽 끝
시대 ; 조선후기
건립시기 ; 1916년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앞면에 〔閑良李行淑妻金氏孝烈之閭〕라고 되어 있고, 옆면에 〈崇禎後五丙辰上巳日 孫琪成竪〉라고 세운 연대와 세운 이가 기록되어 있다.

한량 이행숙의 처 김씨의 효열을 찬양하는 비석이며, 그의 손자 기성(琪成)이 숭정(崇禎, 明末의 연호, 원년은 서기1628)후 다섯 번째 돌아온 병진년에 세운 것이라는 뜻이다.

1980년대 중반에 발행된 봉개초등학교 학구단위 향토지에 보면 “지금부터 약 350여년전 김씨의 남편 이행숙이 와병으로 여러 해를 눕게 되자 집안 형편이 몹시 빈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100세가 넘은 시아버지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 바쳤으며, 더구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병환을 치유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나 끝내 종명하였다.

남편을 여읜 19세의 김씨는 어린 아들을 키우는 데 청춘을 바쳤다. 이씨 집안에서는 이 어린 목자로 하여금 대를 이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로부터 늠앙(懍仰)의 대상이 되어 높이 찬양하는 뜻에서 이 효열비를 세웠다.”라는 해설이 있다.

그러나 350년 전이라는 해설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崇禎後五丙辰(숭정후오병진)이라 되었으므로 비석을 세운 것이 1916년이고, 세운 이가 김씨의 ‘손(孫)’이라고 하였으므로 김씨의 효열 행실은 1800년에서 185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나라가 우리를 간섭하던 시절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후 몇갑자’라는 식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편법적으로 쓰던 풍속이 있었다.

이 풍속이 일제시대에도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사일은 음력 정월 첫 뱀날 또는 음력 3월 3일을 뜻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3월 3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후손을 만날 수 있으면 시대를 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으나 마을 노인으로부터 후손이 함덕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 확인하지 못하였다.

2007년 '나리' 태풍 때 쓰러지면서 두 동강으로 깨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가 2010년 접착제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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