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6,25동란..화순리 진몰용사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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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6,25동란..화순리 진몰용사지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04 1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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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에서 훈련중 사고 또는 질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사망한 병사들 추도


화순리 진몰용사지비 陣沒勇士之碑 0-27 | VIEW : 3,046


화순리 진몰용사지비 陣沒勇士之碑
위치 ; 안덕면 화순리 안덕초등학교내
시대 ; 대한민국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화순리 전몰용사비

▲ 육군299부대 창설


안덕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길이 2m 가량의 비석이 "陣沒勇士之碑(진몰용사지비)"이라는 이름으로 서 있다. 뒷면에는 추도명(追悼銘)이라 하여 '국난을 이기려고 찾어온 젊은 정렬의 우국투사가 장지를 품는 채 전장을 보지 못함을 유한으로 이곳에 잠드렸으니 그령을 삼가 취도하여 이를 기렴으로 봉언하나이다.

단기 四二八五년 一월 二十일 陸軍 第 二九九 部隊 將兵 一同'라고 써 있다.(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원문에 충실하였음)


6·25 동란이 지리하게 계속되고 있던 1952년 세워진 이 비석은 병영에서 훈련중 사고 또는 질환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사망한 병사들을 추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망자의 이름을 한 사람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몇 사람이 사망했는지 어떤 원인으로 사망했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또한 299부대에 대해서도 이곳에 부대가 있었던 것인지 등등 아무런 자료도 구하지 못했다.

2011년 5월 11일 육군본부로 민원을 냈더니
2011년 6월 2일 자료가 없다는 회신이 왔었는데
2011년 6월 13일
육군본부 김규빈 대령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육군 제299부대에 관해서 여러 각도로 찾아봤더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육군 제299부대는 제3보충대대였다.
1951년 3월에 모슬포에서 창설되었다.
1952년 대구로 이동했다.
1964년 타부대와 통합되었다.
창설 당시 대대장은 이창범 소령이었다.


부대의 성격은 군인을 모집하고 훈련소로 보내는 업무로 추정된다.
그밖에 병사들의 사망원인이나 인원수 등은 알아내지 못했다.

이어서 6월 16일에 필자의 집으로 배달된 우편물에는 옛 기록을 복사한 자료가 들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1. 단기4284년 3월 8일 0시 부로 좌기 부대를 창설하야 육군본부 직할로 한다.


2. 부대명칭 및 기타부수사항
가. 부대명칭 ; 육군제3보충대대
나. 편제 및 장비 ; 장교 30명, 사병 164명 계 194명(T/O T/S K 12~50)
다. 소재지 ; 제주도 모슬포
라. 대대장 ; 육군소령 11668 李昌範


3. 임무
○○○○이 배속하는 임시 兵員의 收○, 재배속, 제주도에서 육지 간의 운송 등의 수속을 행함을 임무로 한다.
 

4. 인원 획득
제2항에 의하야 설정된 인원 중 장교 10명 사병 14명을 제외한 殘員을 제2보충대대에서 단기4284년 3월 8일 이내에 획득하여야 한다.


5. 보급 및 장비
인정○ 보급 및 장비는 정상적 보급계통을 통하야 청구하라. 단, 장비에 있어서는 ○○히 제한함.

둘째, 부대의 통상명칭
제1보충대 제297부대
제2보충대 제298부대
제3보충대 제199부대

셋째, 대대장에 관한 자료(아마도 인사기록카드)에는
제3보충대대장 4284.3.8.
제3보충대대장, 제1훈련소 부전 4285.3.10.
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송장환님의 자료에 따르면 1951년 12월 24일 육군 제1훈련소 소속 제2숙영지에서 어떤 적대세력과의 교전중 화재가 났으며, 그 때 화재로 돌아가신 어느 이병의 유족이 끈질긴 사실규명 끝에 사망구분을 ‘변사’에서 ‘전사’로 변경할 수 있었고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2숙영지(안덕면 화순리 지경?) 막사는 전부 천막막사였다고 한다.

'진몰용사'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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