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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준 기자의 제주올레탐방기"올레길, 나도 걷는다"
"올레길은 과연, 제주에 남아 있을까..?"⑤(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9코스,조천-김녕..숨은 비경과 배려없는 공사판
고현준 기자  |  kohj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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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06.11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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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19코스를 반씩 나누어  지난주에도 걸었고 이번 주에도 걸었다.

지난 4일(일요일) 조천-북촌간 구간은 중산스탬프 지점까지 걷는 건 포기하고 북촌까지만 걸었다.

지난 10일(토요일) 걸었던 북촌-김녕구간은 지난번 걸을 때도 비바람 등으로 날씨가 너무 궂은 날이라 힘들게 걸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지만, 4일은 많이 더웠고 10일은 길을 찾지 못해 많이 헤맸다.

   
 

   
 

이곳에 큰 공사판이 벌어져 숲속으로 올레를 안내했지만 올레리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코스는 이곳 저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가지 공사로 걷기도 힘들고 입구를 찾기조차 힘들어 초행자들은 중간에 걷기를 많이 포기했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올레꾼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코스가 되려고 하는 중이다.

10일 걸었던 북촌-김녕구간은 지난 주 중간스탬프까지 가지 못하고 북촌까지만 걸었기 때문에 19.1km 중 9km 정도를 더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다만 이날도 나는 오후 2시 취재약속과 2시30분 점심약속 때문에 또다시 3백m 정도를 그냥 남기고 돌아왔다.

이 남은 구간은 다음 출발지점에 차를 놓고 걸을 때 버스에서 내려 다시 그곳까지 걸으면 되기에 종점스탬프 또한 그때 찍을 예정이다.

그렇게 10일은 서김녕 버스정류소까지만 걸었지만..

   
 

   
 
   
 

제주시내로 들어오면서 함덕해수욕장을 찾으니 지난주 지적했던 괭생이모자반이 다 치워져 있어 무척 반가웠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괭생이모자반이 가득 해 여름을 미리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해수욕장 괭생이모자반이라도 치우자’고 한 것인데 행정에서 이를 다 치운 모양이다.

하기야 제주개발공사에서도 함덕해수욕장 괭생이모자반을 치울 때 삼다수를 무상제공했다고 하는 소식을 보내와 그런 줄 짐작은 했는데 이날 보니 머지않아 괭생이모자반에 따른 피해는 더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바다에 떠다니는 모자반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지역 외의 주변 해안가는 괭생이모자반으로 가득이었다.

빨리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지난 4일 서우봉을 오를 때 나는 서우봉해안산책길을 처음 걸어봤다.
올레길 옆으로 난 이 산책길은 앞으로 19코스의 B코스 정도는 만들어질 것 같은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 길을 다 따라 들어가 보니..
중간에 출입금지구간으로 막혀 있었고..그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이 길은 일제시대때 만든 동굴진지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그곳까지는 길을 내지 않아 절벽과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낚시꾼들만 간간이 다니는 길로 보였다.

이 산책길은 다시 안전한 길을 만들어 일본군 진지동굴과 이어지게 하면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서우봉은...서우봉을 오르면 바다색도 압권이지만 조망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아 누구나 한번 가면 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올레길은 그런 보는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날 다시 걸어본 19코스 북촌-김녕까지 구간에는 이미 많은 곳에서 엄청난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동복환경자원순환센터 공사가 그중 가장 컸다.

올레리본이 사라진 구간에서 나는 숲속에서 몇 번이나 길을 잃을 뻔 했다.

겨우 길을 찾아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동복자원순환센터 공사가 진행중인 곳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서 쉬고 있던 트럭운전사에게 길을 물어 겨우 제대로 된 올레길을 찾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매립장 크기를 보니..
그 정도의 면적으로 지금처럼 늘어나기만 하는 쓰레기를 몇 년이나 또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앞으로 제주도의 모든 채석장은 매립장으로 변하게 될 것은 아닌지..

경기도의 화강암 채석장을 세계적인 문화공간으로 만든 포천 아트밸리의 그것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라 상상력의 부족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물론 도지사나 환경정책부서의 능력부족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이들 같은 사람들이 정책부서에 있는 한 환경적으로 제주도는 늘 낙제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이곳은 넓은 길을 닦고 모든 출입구를 막아 공사를 진행중이었다.

공사장 입구에는 올레19코스는 숲속으로 들어가라는 안내는 했지만 올레꾼을 그냥 숲속으로 밀어 넣고 알아서 나가라는 모양새였다.

그곳은 길이 험하고 정글같은 곳을 많아 길을 찾기에도 어려운 곳이다.
이날도 숲속에서 한 여성을 딱 한사람 보았지만 그 여성이 얼마나 놀랬을까..하는 생각에 아예 보이지도 않게 뒤따라 걸었다.

   
 

이처럼 19코스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두 번을 갔지만 이날 딱 한사람만 보았다.

공사판에는 그리고 모든 개발에는 이런 사소한 배려조차 없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줄기차게 올레를 걸으며 지적을 하는 이유는 제주에서 올레만이라도 하나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제주도의 개발위주의 정책이 계속 되는 한 제주도는 살아남을 곳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환경의 길..
이 올레라도 온전히 남아있어야 하련만..

이 무지막지한 개발의 폭력 앞에 올레라고 무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이다.

19코스는 반씩 나눠 두 번을 걸었지만..걷기의 즐거움보다 걱정만 생긴 올레탐방이었다.

소위 윗자리는 헛똑똑이가 아닌 정말 똑똑하고 진짜로 실력있는 능력자가 가야한다.
그들이 지위를 이용해 마음놓고 휘두르는 도끼질에 누가 다칠지 모르니 걱정도 참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4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우리들을 위해 자유를 준비했다‘는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인 볼테르이다.

볼테르의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알루에이다. 그는 1694년 11월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증인으로 전형적인 부르조아였다.


어린 시절에는 예수회 학교에 다녔으며, 이때 그를 가르친 신부들은 ‘총명한 아이이지만 비상한 악동’이라고 평가했다.(중략)..


볼테르는 23세때 영국으로 건너가 3년동안 런던에 머물면서 영국의 의회정치를 비롯한 사회 문화 풍속 습관 등을 연구하게 된다.


또 로크, 뉴턴, 세익스피어 등의 사상과 예술을 접하면서 각계의 명사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프랑스 사회의 봉건적 체제에 불만을 품고 신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찾으려는 자유사상의 투사가 되었다.

볼테르의 주된 적은 교회였다.
그는 이성적인 종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역사상에 나타난 타락한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예수와 그 산상수훈에 대하여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예수의 이름으로 범해지고 있는 갖가지 불법을 개탄하였다.


볼테르는 무신론보다도 차라리 광신이 더욱 해롭고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권력의 궁전에서 광신의 냄새를 풍기고, 그들은 천국의 보화뒤에 자신들의 이익을 숨긴채 아무런 분별없이 그냥 믿어버리는 우매한 민중애개서 돈과 명예를 빼앗아간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은 그런 파렴치들을 타도하기 위해 총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볼테르는 끊임없이 성직자들과 싸웠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에 무조건 복종하는 속된 권력자들과도 늘 다투면서 살았다.
1717년 볼테르는 루이14새의 사후에 섭정으로 있던 오를레앙 공을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문학사가 랑송의 재치있는 설명에 따르면, ‘볼테르는 이때 처음으로 투쟁을 그치고 한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히려 수감생활 동안에 집필한 희곡으로 출옥후에는 더 큰 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얻게 된다.
‘아루에’라는 본명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중략)..
볼테르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계몽사상의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쓴 ‘캉디드’는 안이한 낙관주위를 공박하기 위해 순진한 젊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온갖 역경을 겪게 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비극성을 부각시킨 다음,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방책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이성에 의한 이상사회 건설의 희망을 제시했다.

(중략)..1778년 5월30일 친구인 빌레뜨 후작의 집에서 숨을 거둔 볼테르는 죽기전에 친구에게 이런 고백시를 남겼다.


“나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내 친구들을 사랑하며 내 원수들을 미워하지 않고 다만 핍박만을 지독히 미워하다가 죽는다”


볼테르의 친구인 빌레뜨 후작은 열렬한 공화주의자로 혁명에 동참하면서 스스로 후작의 칭호를 버리고 평민이 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볼테르의 시신을 자기가 경비를 부담해서라도 국가적 위인이나 유명 작가들이 묻혀있는 파리 빵떼온 묘지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그의 유헤는 데카르트와 미라보가 묻힌 빵떼온 묘지에 안장되었고 묘비에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여기 이 사람은 인간의 정신에 강한 자극을 주고 우리들을 위해 자유를 준비했다’는 글귀가 새겨졌다.

역사적으로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화는 종교중심,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중심, 자연과학 중심의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볼테르는 이성과 자유를 내걸고 전제정치와 봉건적 종교체제에 대항해 싸운 사람이며, 특히 신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이다.


위인은 갔지만 위인이 남긴 정신은 남는다. 또한 묘비명도 남는다.


많은 묘비명이 있으나 볼테르의 묘비명처럼 명쾌하고 간단명료하게 그 사람의 정신과 업적을 새긴 묘비명도 없을 것이다. 이 묘비명은 곧 그의 면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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