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엄쟁이..구엄리 돌염전(소금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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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엄쟁이..구엄리 돌염전(소금빌레)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 승인 2017.06.12 2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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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에겐 소금 만드는 일이 생업의 한 수단.. 1950년 전후 자취 감춰


구엄리 돌염전(소금빌레)

 
구엄리 돌염전
위치 ; 애월읍 구엄리
시대 ; 조선
유형 ; 생산유적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 구엄리_돌염전(한라일보).

▲ 구엄리_돌염전

우리나라 소금 생산은 일찍이 해수를 이용한 해염이 주를 이뤘다. 해수를 가마솥에 넣어 화력을 이용하거나 염전에서 일광에 의한 해수의 증발 과정을 통해 소금을 얻는 방법이다.


제주섬은 다른 지역과 달리 염전 형성이 불리한 지형이다. 염전은 대체로 강우일수가 적고 사빈이 발달하며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 입지한다.

제주는 비오는 날이 많고 다량의 모래를 공급받는 전형적인 사질해안이 발달하지 못해 염전형성이 불리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정의 '제주풍토록'(1520)에는 "서해처럼 전염을 만들자고 해도 만들 땅이 없고, 동해처럼 해염을 굽자고 하나 물이 싱거워서 백배나 공을 들여도 소득이 적다"고 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해안가는 모두가 암초와 여로 소금밭을 만들 만한 해변의 땅이 매우 적다. 또한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적어 소금이 매우 귀하다"고 썼다.


'남사록'에는 "별방에서 정의까지 사이에 염전이 몇 군데 있다. 일찍이 충암록에 "땅이 큰 바다로 둘러 쌓였으나 소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기에 여러 지방민에게 물어보았다.

무오년부터 강려가 목사가 됐을 때 , 해변의 소금 나는 땅을 보아 잘 아는 사람을 가르쳐 육지 연해에서 바다소금 만드는 것처럼 시험해 보았다.

한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 겨우 4~5두였는데 맛이 매우 썼다. 지금은 온 섬에서 일곱 군데 소금가마가 있어 충분히 관가의 주찬을 이어 댈 만하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것을 쓸 수 없으며, 모두 육지에서 사와야 한다고 했다."


늦어도 16세기 이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지역 염전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한국수산지'를 통해 구체적 수치가 드러난다. 조선총독부농상공부편찬 '한국수산지'3집(1910)엔 그 무렵의 제주지역 염전 면적과 제염총액이 상세하다.


제주군, 대정군, 정의군으로 나눠 실린 염전수는 23군데에 이른다. 이들 염전 면적은 모두 합쳐 5만3059평(약 17만5402㎡)에 달하고 연간 생산량은 35만4326근(약 213톤)으로 집계된다.


'한국수산지' 역시 제주가 소금을 만드는 데 불리한 지형적 조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암석 사이에 다소의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래판이나 진흙땅을 가릴 것 없이 이를 개간해 염전으로 만들고 있는데, 심한 경우는 불과 1평 남짓의 공지에 염전을 만들어 '어린애 장난' 같은 제염을 하는 곳도 있다고 적었다.

조사단은 "매년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론 도민 수요의 절반을 채우기에 부족하다"며 주로 진도 부근에서 소금을 들여온다고 소개됐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빌레'를 소유해 소금 생산하는 일을 했습니다. 6·25가 끝난 뒤에는 판로가 없고 인력도 부족해 서서히 소금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1955년쯤까지 소금을 만들었을 겁니다."


구엄리 어촌계장을 지낸 조두헌씨(75)의 증언이다. 조두헌씨는 현재 복원된 돌염전에 고증을 하고 복원에 앞장선 분이다.(한라일보 2010년 6월 11일 진선희 기자)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 한다. 예로부터 소금 곧 '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엄한 마을 바위(巖)의 지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1977년 애월읍지 참고) 그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겐 소금을 만드는 일이 생업의 한 수단이었는데 195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엄 마을 포구 '철무지개' 서쪽 '쇠머리코지'에서부터 중엄 마을과의 경계인 '옷여'까지가 소금밭이었다. 이 일대는 제주도의 다른 해안에 비하여 평평한 암반지대를 이루는데 그 길이는 약 400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50m이다. 이곳은 북서풍이 셀 때 파도가 쳐올라올 뿐 바닷물에 잠기지 않는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여 지적도가 있을 수도 없지만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고 뭍의 밭에 비하여 값도 상당히 비쌌던 듯하다. 전통적인 밭나눔과 같이 4표(四標)'로 구획하였다.

한 가정에 보통 20∼30평 정도의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제주민속유적 295∼299쪽)


염전이 거래되었던 사실은 김상순씨(63)에 의해 확인됐다. 그의 부친이 염전을 사들였던 문서를 보관하고 있어서다. 단기 4286년(1953년) 음력 5월 6일 작성한 것으로 되어있는 염전매도증서다.


종이에 붓으로 쓰여진 이 증서엔 '일금 8백환'으로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리 신다린내 아래'에 있는 염전을 김씨의 부친이 사들였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다린내는 현재 복원된 돌염전터의 서쪽 지경이다.

매도인, 매득인, 보증인의 이름과 함께 "위에 적은 염전은 본래 본인의 소유가 확실한 바 앞에 적은 대금을 전부 영수하고 귀하에게 매도하였으니 이후 다름이 없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증을 연서하여 이에 증서를 작성'한다고 써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구엄리의 전체 염전 규모는 3000㎡에 가깝다. 연간 생산량은 17톤을 조금 넘겼다. 염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면적당 생산량은 19.4㎏으로 제주지역 대표적 염전 지역이던 종달리의 3.7㎏보다 앞섰다. (한라일보 2010년 7월 16일)


제염 과정을 보면 ①물 운반 ②곤(간)물 만들기 ③염도 확인 ④곤(간)물 보관 ⑤소금 만들기 순으로 진행된다. ①허벅으로 바닷물을 지어 올린다. 농축도에 따라 호겡이의 위치를 바꿔간다.

②소금기가 농축된 바닷물을 곤물이라 하는데 소금빌레는 보통 여섯 개로 칸을 나누어 '두렁막음'을 한다. 곤물을 마련하는 구역을 '물아찌는돌' 또는 '호겡이'라고 하고 소금을 직접 만드는 돌을 '소금돌'이라 하는데, 보통 여섯 개의 '호겡이' 중에서 곤물을 만드는 호겡이가 넷이면 소금돌은 둘 정도이다.

'물아찌는돌'에서 소금기를 농축시키는 일을 '조춘다'고 한다. ③달걀로 염도를 확인한다. 달걀을 띄워서 가라앉으면 염도가 부족한 것이고 뜨면 곤물이 된 것이다.

④소금돌에서 바로 소금을 만들지 못한 곤물은 일정한 장소에 보관한다. 농축시켜가는 과정에서 비가 오거나 일조량이 부족하면 어차피 보관해야 하는 것이다.

비로 보관했을 때에는 비가 그치면 다시 내놓아 농축시키고, 일조량이 부족하면 겨울에 솥에서 달여 소금을 만든다. 곤물은 '확'에 보관한다.

'확'은 가까운 곳에 찰흙으로 빚어 한 곳에 고정시킨 항아리이다. 사람이 그 안에 서면 목이 찰 만한 높이, 폭은 양 팔을 벌려도 충분할 정도이며 깨지지 않게 두껍게 만든다.

나중에는 큰 항아리를 썼다. 그 위에 빗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노람지'를 덮는다. ⑤호겡이에서 햇볕으로만 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을 '돌소금'이라 하고, 곤물을 솥에서 달여 만든 소금을 '삶은소금'이라고 한다. 돌소금이 넓적하며 굵어 품질이 높아 인기가 있었다.


만들어진 소금은 거의 곡물과 교환하였다. "소금 맨들앙 쇠에 실렁 이 마을 저 마을 댕기멍 보리도 바꽝 오곡, 조도 바꽝 오곡 했주. 구엄 땅이 물왓이란 비가 오민 농사도 잘 안 되곡 해부난 소금을 안 만들민 살질 못했주."(제주민속유적 295∼299쪽)


소금을 만드는 일은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바다와 밭을 오갔던 남자들은 일손이 부족할 때 소금 제작을 거들었다. 구엄에서 생산된 소금은 수산, 장전, 소길, 금덕, 용흥리 등 인근 중산간 마을로 팔려나갔다. 소금을 조나 보리와 바꿔오는 물물교환 방식이었다.


"소금 만드는 데 여간한 노동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15~20일 정도는 꼬박 지켜봐야 합니다. 농사도 안되고 수입원도 마땅치 않은 시절이라 소금 생산에 가족의 생사가 달려있었습니다. 힘들어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죠."


구엄리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소금밭은 생업수단이 바뀌고 다른 지역에서 들어오는 소금이 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갔다. 염전의 흔적을 말해주는 물막이용 진흙 둑도 속절없이 바닷물에 씻겨나가버렸다..(한라일보 2010년 6월 11일 진선희 기자)


이재수의 난 때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 마을을 지날 때 염전 간수통 속에 숨어서 구명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신엄중학교 30년지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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