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충과 효..금성리 이필완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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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충과 효..금성리 이필완효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14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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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얼굴 모르는 유복자..성장후 추복,영조대왕 승하때 흙짐 날라


금성리 이필완효자비

 

 


忠孝嘉善大夫 李公弼完之閭
위치 ; 애월읍 금성리 마을 입구 비석거리
시대 ; 조선
유형 ; 비석(충효열비)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이필완 효자비는 151cm 높이의 비각에 보존되고 있는데 높이 86cm, 너비 윗부분 54.5cm, 아랫부분 53.5cm, 두께 윗부분 24cm, 아랫부분 23cm이다.

비 앞면에 【忠孝嘉善大夫李公弼完之閭】(충효가선대부이공필완지려)라고 새겨 있고고, 뒤쪽에 【同治元年正月 日】(동치원년정월 일) 그 옆으로 【一九六五年三月 日 重竪】(일구육오년삼월 일 중수)라 새겨져 있다. 철종13년(1862) 1월에 정려비를 세우고 1965년 3월에 보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탐라기년에 보면 이필완은 제주목 우면 입석촌(立石村, 지금의 대림리) 사람으로 숙종23년(1697) 3월 19일 이세훈(李世薰)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유복자(遺腹子)였다.

그는 아버지 장사를 지내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 하다가 성장한 후 추복(追服)하여 제를 지냈으며 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아버지 묘소에 제사지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살며 제사를 지냈다. 평소에 짐승 고기(또는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므로 꿩이나 닭을 구하여 제물로 썼다.

그러다가 어느 제삿날에는 꿩도 닭도 구하지 못하여 고민하다가 어머니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자 난데없이 매 한 마리가 꿩 한 마리를 차고 날아와 떨어뜨리고 갔다. 그는 그 꿩을 가지고 돌아와 그 날 밤 제사에 썼다.


영조52년(1776) 3월 이필완이 나이 80이 되던 해 영조대왕이 승하했다. 그는 석 달 동안이나 쇠마(衰麻, 상복)를 벗지 않고 소식(蔬食)하였으며 능역(陵役)에 나가 흙짐을 져 날랐다.

그의 이와 같은 충효심이 알려졌으므로 1781년(정조 5) 제주순무시재어사 박천형(朴天衡, 1737~?)에 의해 효자로 포양(襃揚)되었다. 정조9년(1785)에 사망하였고,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철종13년(1862) 1월 제주목사 신종익(申從翼)에 의해 정려가 내려졌다.


이필완 효자비가 있는 곳은 이 마을의 비석거리로서 이필완효자비 외에도 다음과 같은 비석들이 있다.
【忠孝宋擎天義明仁明三父子之閭】【通政大夫高廷彦 忠孝烈張氏之閭】【金海后人金昌白妻 孝烈晋州姜氏之閭】【處士高永雲妻孝烈梁氏之閭】【軍警忠魂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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