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탐라시대 초기..금성리 석축유적(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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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탐라시대 초기..금성리 석축유적(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1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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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浦口)의 접안시설과 관련된 유구로 파악


금성리 석축유적(멸실)


위치 ; 애월읍 금성리 446의 1번지 일대. 금성주유소 맞은편 경작지 부근. 현재는 4차선 아스팔트 도로만이 시원스레 뚫려 있을 뿐이다.
시대 ; 탐라시대 전기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항·포구 접안(接岸) 시설

 

▲ 금성리_석축(북제주군문화유적)

▲ 탐라시대_석축유적 발굴장면

 

1995·96년 애월-신창간 국도 확장 시 이곳에서 유물포함층이 확인돼 긴급구제발굴에 들어갔고 뜻밖에도 길이 60m, 폭 4.5m, 높이 2.1m 가량되는 석축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긴급구제발굴 과정에서 곽지식 적갈색토기와 청동비녀·석기 등이 출토된 금성리 석축유적을 학계에서는 탐라국시대 환호나 제방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했었다.


1998년 1월 6일 현장에서 본격 발굴을 시작하여 1998년 5월초 석축유적의 범위와 그 성격 규명을 위한 발굴이 제주사정립사업추진협의회 주도로 이뤄졌다.

석축시설물에 관해서는 도내 최초의 성벽시설물로 추정·보고된 바 있다. 이 시설물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추가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성벽시설물의 추가된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방어 혹은 경계와 같은 시설물이 위치할 만한 지리적 요건으로서는 불합리한 이유도 있다고 한다.


발굴 결과 탐라 전기(기원후 100∼500년)의 석축과 패총 뿐 아니라 탐라 후기(기원후 500∼900년), 고려시대의 도로시설물 등 유구와 곽지리·고내리식 토기, 중국제 화폐인 화천(貨泉) 등 각종 유물이 확인됐으며, 주변에 패총과 같은 폐기장, 주거와 관련된 시설물이 확인되었다. 중심년대는 기원후 2∼3세기대로 파악됐다.

즉, 시설 축조는 탐라시대 전기에 이루어졌으며 고려 초기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석축 아래 암반층은 바닷물을 먹은 흔적이 있는 현무암층이었다. 석축은 바로 바닷모래가 퇴적된 위로 축조돼 있었던 것이다. 이는 석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형성돼 있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약 2천년전 바다는 바로 석축유적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해안선은 육지화로 인해 석축유적 현장과 직선으로 2백미터 가량 바깥쪽으로 밀려난 상태이다.

거기에다 금성천 하류와 연결되기도 한다. 금성천은 하상폭이 상당히 넓고 돌출암반이 거의 없다. 당시 고대선박이 접안하기에 편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유적은 포구(浦口)의 접안시설과 관련된 유구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바다와 만나는 금성천 하류 일대는 항포구였을까?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있다. 바로 화천의 출토이다. 중국 신대(新代)의 화천은 기원후 14년 주조되기 시작 40년에 폐지된 것으로서 유적의 형성시기 및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제주섬에서 화천이 발견된 곳은 제주시 산지항 포구와 구좌읍 종달리 습지유적인데 모두 바다와 연관돼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기원 무렵부터 한반도는 물론 중국 등과 교류를 했던 항포구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른바 중국∼한반도서해안∼남해안∼대마도 등을 잇는 '동방교역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한적한 시골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이곳이 약 2천년전부터 한반도·중국과 일종의 대외무역항 역할을 했다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곳과 불과 5백여미터 떨어진 도내 최대의 곽지패총에서 남해안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토기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추정은 힘을 얻는다.

금성리 바닷가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항포구는 국내 최대규모인 곽지패총의 관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다 고내리 유적 또한 3km 정도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기원전후부터 이곳 일대는 제주역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에 설치된 15개 현촌 중 귀일 고내 애월 곽지 등 4개 현촌이 밀집돼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약 2천년전 한적한 이곳 바닷가 일대는 외부와의 교역을 할 만큼 충분한 역량과 토대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사실 금성리와 곽지리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하나의 마을이었다. 두 마을이 오늘날과 같이 분리된 것은 1894년 이후의 일이고 초등학교도 '곽금초등학교'로 한 학교에 다닌다.

석축유적과 관련해서도 '금성'(錦城)·'곽지'(郭支)라는 한자명은 음미할 만하다. 금성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성'이라는 뜻으로, 곽지는 '성곽'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두 마을 지명을 따면 말 그대로 '성곽'(城郭)이 되기도 한다.


금성리 유적을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그때까지 제주섬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돌담으로 만든 원형집자리가 발굴됐다는 점이다.

발굴 당시 반원 형태인 석렬주거지는 직경 7m 규모로 파악됐다. 유구 내부에는 불에 탄 흙과 생활공간과 관련된 시설 뿐 아니라 적갈색 토기와 방추차·갈돌 등 생활유물이 깔려 있어 주거지임을 알 수 있다.

고대(古代) 문헌기록에 의하면 '집은 둥글게 돌담으로 둘러서 풀을 덮었다'고 하는데, 이 문헌에서 지적한 집자리로 여겨진다.

원형돌담집자리 유구는 기원전후 제주섬의 주거유형에 대한 통념을 뒤바꿔 놓는다. 제주시 삼양동 유적이나 외도동 유적에서 보편적으로 인식되던 수혈움집 이외의 또 다른 주거형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현무암을 이용한 지극히 제주적 집자리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민일보 1998년 1월 7일, 한라일보 2002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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