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서제공이 설촌..가시리 충의사(한천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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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서제공이 설촌..가시리 충의사(한천 사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2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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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사장(射場)과 서당(書堂) 개설, 지방민 교훈.. 훈민시덕(訓民施德)


가시리 충의사 忠義祠(한천 사당)


가시리 충의사 忠義祠
위치 ;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
시대 ; 조선 초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위인선현유적

 

 

 

가시리는 1392년 7월 고려조의 멸망과 동시에 고려조의 충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청주한씨 서재(恕齋)공 한천(韓蕆) 씨가 충절을 지켜 귀양와서 설촌하였다고 한다.

청주한씨 제주문중회에서 조사한 사료에 따르면 서재공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부인과 두 아들을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성산포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인가가 없는 이 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표선면향토사 71-75쪽)

한천


공양왕 때 대제학
온건세력의 대표주자인 정몽주와 함게 왕조 재건 모색

공양왕의 사위 우성범을 중심으로 이성계 제거를 위해 역성혁명 세력의 대표주자인 정도전 탄핵하는 등 정치적 공략 시도
공략실패 정몽주 살해당하고 나머지 인사들 대거 숙청
한천도 1392년 제주도 정의현에 유배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 20년(1370) 2월에 한천(韓蕆)이 경상도순문사가 되었고, 공양왕 3년(1391)에는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에 방치하고 왕대비가 청정(聽政)하게 되자 단양군 우성범 및 진원군 강준계를 회빈문 밖에서 베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한천(韓蕆)을 귀양보냈다.》라고 하였다.

서재(恕齋) 공은 이곳에서 사장(射場)과 서당(書堂)을 개설하고 지방민을 교훈하였고 훈민시덕(訓民施德)하였다. 중세에 실호(失護, =失墓)하였다가 1955년 찾게 되었다.(淸州韓氏史鑑 1976년刊 31∼32쪽)


제주향교지(濟州鄕校誌)에 의하면 〈고려말에 전리판사 판개성부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한 중신으로 고려의 중흥을 도모하다가 이태조의 등극에 불복하여 제주로 유배되어 표선면 가시리에 적거하면서 학당을 세워 인화와 예의의 기준이 될 향약을 정하고 학문을 가르치니 한학의 개척자적인 역할을 다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하였다.(濟州鄕校誌 692쪽)


그러나 한천의 거취에 대해서는 이와는 다른 자료도 있다. 즉, 디지털한국학 《한국의 역대 인물》란에는 〈한천(생몰년 미상)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우정승 악(渥)의 손자로, 도첨의사(都僉議事) 대순(大淳)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 14)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古賦)로 민안인(閔安仁) 등 55인, 십운시(十韻詩)로 임한(林翰) 등 41인을 뽑았으며, 1371년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나와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 태조로부터 전조대신(前朝大臣) 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어 원종공신전 15결과 노비 2명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권희(權禧) 등과 함께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참고문헌 ;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張寬開國原從功臣錄券)〉라고 하여 유배된 후에 계속 제주에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처음으로 집을 지어 살던 곳에 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忠義祠)를 지어 입도 선조의 유업을 기념하고 있다. 이 주변의 지명을 보면 큰뒷밭(충의사 있는 곳),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원정착지),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射場)터, 중이왓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한천 공의 묘는 마을 가까이에 있다.(가시리 서재한천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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