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당대 부호..신효동 송두옥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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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당대 부호..신효동 송두옥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2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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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털어 민폐 막았으니 이같은 시혜 전세에 아직 없었다'


신효동 송두옥선정비(宋斗玉善政碑)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1597-3번지의 길 남쪽. 서상효와 신효의 경계선인 도로상의 ‘조방장동산’(일주도로에서 300여m 북쪽 지점)에 있다. 신효동 1544번지에 있으나 이 번지는 신효동 일대의 도로이다.
시대 ; 조선 말기
유형 ; 선정비
비석의 규모 ; 가로 60cm, 세로 168cm, 높이 176cm, 폭 20cm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 상효동_송두옥선정비(2007

▲ 상효동_송두옥선정비전경(2007).

송두옥선정비의 전면에는 큰 글씨로

《邑侯宋公斗玉善政碑》(읍후송공두옥선정비)라 새겨져 있고,

‘捐出家財 防給民弊(가산을 덜어내어 민폐를 막았으니)

如斯施惠 未有前世(이와 같은 시혜는 전세에 아직 없었다)’라 되어 있으며,

옆면에는 ‘光緖十七年’(1891)이라고 연대 표시가 되어 있다.

비석의 위에는 갓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光緖는 중국(中國) 청(淸)나라 덕종 때의 연호(年號)로 1875년부터 1908년까지이다. 읍후(邑侯)는 현감이나 군수 등 수령에게 존칭을 나타내기 위하여 붙이는 것이다. 또는 읍재(邑宰)라고도 한다.


송두옥은 조선 말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무신. 철종1년(1850)~1922년.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귤헌(橘軒). 제주목 성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송신(宋藎), 형은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구한말 구한말 18척의 대선단(大船團)으로 교역을 한 당대의 부호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대정현감을 지냈으므로 ‘송대정’이라고 불렸으며 ‘송대장’이라고 하기도 했다.


고종27년(1890)3월8일 명월만호(明月萬戶)를 거쳐, 마종문(馬鐘文)의 후임으로 정의군수로 부임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승정원일기를 보면 송두옥은 고종27년(1890)12월28일부터 고종28년(1891)8월23일까지 정의현감으로 재직했다. 정의현감 재임시에도 녹봉을 덜어내어 폐단을 바로잡아서 치적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승정원일기 고종28년8월19일)


고종29년(1892)7월, 안승관(安承觀)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했다가 같은 해 9월에 이임했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자신이 받은 급료를 내어놓고 낡은 폐단을 개혁하여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소재불명)를 세웠다.


고종30년(1893)5월부터 1894년 2월까지 하흥도(河興道)의 후임으로 대정군수로 재임하였다.(승정원일기에는 고종30년(1893)4월6일 대정현감으로 결정되었고, 신병을 이유로 사임을 청하니 고종30년(1893)9월29일 체직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재임 중인 1893년 가을 기근이 심해 주민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자 1894년 봄에 자기 재산으로 쌀 100석을 내놓아 굶주린 주민들을 진휼하였다. 또한 대정향교를 보수하였다.
정의현감, 제주판관, 대정현감 직에서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광무2년(1898)1월 방성칠이 민란을 일으키자 전 현감 홍재진과 함께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아 주모자 방성칠 및 모사 강벽곡(姜辟穀)을 체포·주살하고 민란을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홍재진(洪在晋)·김남윤(金南胤) 두 명과 함께 가자(加資)되어 품계가 올라갔고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1901년 다시 신축민란이 일어나 제주성이 함락되자 홍재진과 함께 목포로 피난하기도 했다.(속음청사)


호방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 그리고 남다른 기지로 당대의 지방 유림을 주름잡았던 사람이다. 또한 힘이 장사여서‘송대장(宋大將)’이라고도 불렀다. ‘송대정(宋大靜)’이라면 제주도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전라도갑부’로 이름을 전할 정도로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주시 한일은행 자리에 높은 누각을 지어 도내의 많은 유림들과 선비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즐기며 호화롭게 놀기도 좋아했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67쪽) 1907년 사립의신학교 설립 당시에도 총모금액 12,303,000원 중에서 송두옥 혼자서 200원을 쾌척하였다.(제주교육사 196쪽)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송두옥에 대하여 ‘송대정(宋大靜)은 제주읍 사람으로 나이는 40여세, 너그럽고 후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 제주 대정 정의 3읍 관(官)을 두루 역임했고 집안이 부유하나 남의 원망을 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보완 1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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