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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준 기자의 제주올레탐방기"올레길, 나도 걷는다"
"여름올레는 뜨겁고 힘든 고행의 길.."⑦(하프올레걷기 21코스)해녀박물관-석다원..아름다움도 쉬며 가는 길
고현준 기자  |  kohj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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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07.16  1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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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올레걷기는 더위와의 힘겨운 싸움이다.

더운 날씨도 그렇지만 지열이 열기를 더해  걷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고 쉴만한 곳도 나타나지 않는다.

폭풍우에도, 눈이 내리는 날도, 더욱이 추운 겨울에도 올레를 걸어봤지만 여름이 사실 가장 걷기에 힘이 든다는 사실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날 올레를 걷는 사람들이 간혹 보였다.

아마 그들도 사막을 걷듯 뜨거운 길을 걸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지난 7월15일(토요일)은 지난 2주간 걷지 못한 올레를 걸으려고 미리 마음 먹었었다.

어느 정도의 더위야 참으면 되려니 했고..
처음 걸을 때만 해도 바람이 솔솔 불어와 걸을만 했지만 짧은 올레21코스를 다 걷지 못하고 중간스탬프만 찍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하도리 해녀박물관에서 시작되는 21코스..거리는 11.5km정도였기에 한번으로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만 걷고 돌아와 버렸다.

오전 10시 11분 해녀박물관에 도착했다.

이날도 올레수첩을 놓고 오는 바람에 해녀박물관으로 들어가 팜플렛 하나를 들고 나오면서 소라로 만든 조그만 화분과 해녀종이인형만들기 체험 등 뮤지엄샵에서 사진 몇장을 얻을 수 있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해녀박물관은 아니었기에 사진만 몇장 찍고 나와 걷기 시작했다.

   
 

   
 

기억이 주는 감으로 올레길로 들어섰다.

해녀박물관 안에 예전에는 이곳 저곳에 붙어있던 올레리본이 다 없어져 감으로 올레코스를 따라 들어간 것이다.

이곳을 향해 가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 오시기에 인사를 하자..
“무사 영 벳살이 지독허우꽈(왜 이렇게 햇볕이 따가운가요?)..” 라고 말했다.

이 어르신도 요즘 더위에 놀라셨나 보다.

아주 옛날 제주도말을 듣는 기분이 들어 반가웠다.

   
 

   
 

얼마전 엘고어 전 미국부통령이 한 말이 생각나게 하는 얘기였다.

“지구는 그동안도 뜨거웠지만 앞으로도 계속 뜨거워질 것이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바로 내가 부닥치고 살아야 할 생존의 문제다.
환경문제는 이렇게 더운 날, 우리를 힘겹게 만들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다.

그런 아무 생각없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아 있을 경우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들로 인해 더욱 고통받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실은 걱정인 것이다.

   
 

   
 

21코스인 초입인 작은 숲속으로 들어가도 리본은 보이지 않았다.

내 기억속에는 운동장이 남아 있었다.

운동장쪽으로 들어가니 올레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 주변에는 노란 황금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21코스에는 유독 멸종위기 2급으로 알려진 황근이 많이 피어 있었다.

이 길을 나오니 면수동길..
마을안길이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길..

드디어 더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이 불어오기에 나무그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물 한모금 마시고 잠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앉아 땀을 식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가면서 조금만 걷고 많이 쉬자..

하지만 그 다음에는 쉴 곳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그냥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걸어가는 동안 보이는 들길은 참 아름다웠지만 쉴 수가 없으니.. 땀을 계속 흘리고 걸었다.

   
 

   
 

별방진에 다다르자 갑자기 별방진으로 오르고 싶어졌다.
마을길로 들어서지 않고 별방진 돌성으로 올라갔다.
이 별방진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마을을 감싸 안고 만든 성이었다.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오직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만든 성처럼 보였다.

이 마을에 꼭 지켜야할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는 성이었다.

이 돌성을 지날 때 전에 걸을 때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는데..
하는 생각이 났다.

   
 

   
 

   
 

그렇게 덥기만 한 들길을 다 따라 나오니 바다가 보이고..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나타났다.

1시간 30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더 이상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11시25분..중간스탬프를 찍고 나니 바로 앞에 식당이 있고 망고주스를 파는 곳이 보였다.

망고주스를 먹느냐 식사를 하느냐..

나는 식사 먼저 하고 주스는 그후에 마시기로 하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이 드셨다는 칼국수..

홍합은 커서 먹을만 했다.

맛은 김대중 대통령의 표정이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그곳에서 성산지역 시민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부지런한 고기봉 시민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금방 그곳을 지나쳐 왔다”며 “세화장인데 곧 오겠다”고 했다.

   
 

   
 

 

그와 망고주스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성산지역 환경문제 지역을 일일이 소개해 줘 많은 것을 보고 올 수 있었다.

마침 고기봉 기자는 제주시로 간다며 해녀박물관까지 태워다 줘 너무 감사했다.

고기봉 기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만, 여름철 올레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조금 참았다가 뜨거운 여름이 지나면 올레코스 걷기, 그것도 반 코스씩만 걷는 올레걷기에 한번 도전해 볼 것을 권한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6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세가지 업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이다.

 

“(중략)..신임대통령 제퍼슨은 전임자 애덤스와 그 신조가 매우 달랐지만, 여전히 교양이 있고, 온후한 버지니아 사람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18세기적인 철학자이며, 19세기적인 정치가인 제퍼슨은 정치가로서의 장점을 교묘히 조화시켰고,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지식과 관심도 겸비한 사람이었다.

가문, 풍채, 교양 등으로 보아서는 귀족적이었으나 그는 때때로 평민적인 검소한 모습을 하길 좋아했다.

그의 인기는 해밀턴이나 워싱턴도 놀랄 정도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대중을 믿고 있다는 것을 대중들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인을 신뢰하고 낙천적으로 행동하는 그의 자세가 이상할 만큼 대중들로 하여금 깊은 매력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가 “나는 하나님의 제단앞에서 인간의 정신에 가해지는 모든 학정에 끝까지 대항하겠다”라고 맹세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보여준 열광적인 성원은 그의 이같은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퍼슨의 사상의 중심은 개성의 존중과 정치상의 자유였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소수의견의 존중,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에 힘썼다.

그리하여 그는 1804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이러한 민주주의 초석다지기 외에도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하는 등 국토확장에도 지대한 공을 새웠다.

180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재퍼슨은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으로 취임하여 이번에는 교육 발전에 노력하였다.

제퍼슨은 그가 싫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강조한 것이 각각 세가지씩 있었다.

싫어하는 것은 맹목적인 충성과 고상한 척 하는 것, 열광적인 맹신이었고, 일생 동안 사랑했던 세가지는 건축, 미술, 음악이었으며, 강조한 것은 생명과, 자유의, 행복추구라는 3가지 이상이었다.

미국 정치사상 아마 토마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처럼 서로 인연이 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제퍼슨은 1796년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애덤스 밑에서 부통령을 지내다가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퍼슨에게 패한 애덤스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매사추세츠주의 퀸시에 있는 고향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후 제퍼슨도 1809년 정계를 은퇴하여 버지니아주에 있는 고향 몬티 셀로로 돌아갔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자기 고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고받았고, 일상생활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또한 새로은 국가의 미래에 대해서 여전히 서로 다른 견해로 토론하곤 했다.
이들의 서신교환은 후에 미국 정치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들은 독립선언 기초위원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전직 대통령들이었고, 또 함께 많은 것을 회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1826년 7월3일, 마을의 주민대표가 애덤스를 찾아와 제50회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90세의 전직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노쇠해져 있었다.

7월4일. 애덤스는 거의 의식을 잃은 채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는데 그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토마스 제퍼슨만이 살아 남는구나..”

그는 독립선언 기념일 오후 6시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애덤스는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제퍼슨 역시 일년 전부터 비뇨기 질환과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립선언기념일 전날인 7월3일, 그는 혼수상태에서 잠시 의식을 찾는 듯 하더니 이런 질문을 했다.

“오늘이 4일인가?”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제퍼슨도 애덤스처럼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의미 깊은 날인 미국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 오후에 사망했다.

전국민이 애도 속에 장례가 치러진 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미국 국민들은 그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세웠다.

“토마스 제퍼슨, 미국 독립선언서와 버지니아 종교 자유령의 입안자이며,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립자인 그가 여기 잠들다”

품위있게 늙어, 품위있게 죽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램이다.


일본의 작가 미야우치 히로이치는 ‘아름다운 노후, 자신있는 성’이란 책에서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제퍼슨의 인생이야 말로 잘 살고 잘 죽는 것의 전형을 보여준 삶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는데, 사람이 죽어서 남기는 이름은 세인의 기억과 묘비명으로 남는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묘비명에 새길 단 한가지의 뚜렷한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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