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추자도 간첩사건...대서리 반공탑(反共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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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추자도 간첩사건...대서리 반공탑(反共塔)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7.25 2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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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분들 충혼 기리기 위해 세운 탑'


대서리 반공탑(反共塔)


대서리 반공탑 反共塔
위치 ; 추자면 대서리 추자수협 뒷동산
시대 ; 대한민국(1974년)
유형 ; 순국기념비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관련 사건 ; 추자도 간첩사건

 

 

 

 

서기1974년 5월 20일 깊은 밤 북한의 무장간첩들이 추자도에 침입하였다. 침투한 간첩은 3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1명은 추자도 출신 원완희였다.

경찰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침투 일시 ; 1974년 5월 20일 21:00경
침투 장소 ; 대서리 속칭 더널 해안
침투 방법 ; 간첩선 (해상)


상황 ; 원완희 외 2명은 위 장소 시간에 침투, 옛집(대서리 128번지)을 찾아갔으나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인근 거주 숙모 댁에 가 인사를 드린 후 사촌동생 원◎◎(전 추자면 부면장) 안내로 처 ◎◎◎의 집으로 가 며느리와 손자 2명과 인사를 나누고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오다 신고를 받고 근처에서 잠복중인 추자지서장이 간첩 1명을 검문하는 순간 간첩이 1되 들이 술병으로 지서장의 이마를 내리치고 수류탄 핀을 뽑아 던지려고 하는 것을 같이 출동했던 서병철 순경이 이를 뺏으려고 달려들어 간첩의 손을 잡고 서로 껴안아 뒹굴던 중 도주하던 다른 간첩 1명이 쏜 총에 맞아 손을 놓치면서 수류탄이 폭발, 현장에서 순경 서병철, 간첩 1명, 면사무소 직원 1명이 사망하고, 도주로를 차단하여 잠복중이던 방위병 2명은 도주하던 간첩 1명이 쏜 총에 맞아 역시 사망하고 원완희 외 1명은 도주하였음. 노획 물품으로는 소련제 권총 1정, 실탄, 암호문, 독침 등 다수 (경찰 측 자료)

원완희의 부는 원용형, 백부는 원용혁(추자도 초대 목사)이고, 막내 숙부 원용덕은 일본에서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5개 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인텔리였으며, 맥아더의 통역을 맡았었다고 하는데 해방 직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문교부 차관 러시아대사 등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원완희는 6·25 때 동생과 함께 출정하였는데, 동란 중에 형제가 다 전사한 것으로 전사통지서를 받았었다. 원완희는 출정 당시 노모가 계신데도 형제가 함께 징병된 것에 대하여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월북 공작 임무를 띠고 간첩으로 남파된 이들 중 간첩 1명(조장으로 추정)을 대동한 원완희는 자기가 살던 집을 방문하였고, 현재의 목포식당 자리에서 숙모(원용덕의 형의 처)를 만났는데 부산에서 장사하다 왔다고 말했으며, 아들이 살고 있는 집에 가서 며느리와 손자 등을 만났다.

외출했던 처자가 들어오자 상봉하고 돈을 주었다. 경찰에 신고는 원종대 원주희가 하였다.(신고 시점은 확실하지 않고 처가 신고했다고도 한다)

당시 해군부대가 있었지만 군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경찰이 예비군과 함께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서장 백길호(당시 경위)와 서병철 경사(당시 순경)가 면사무소(현재 면사무소 사택)앞에서 이들과 맞닥뜨렸다. 지서장이 권총을 빼어들고 '꼼짝말아'를 외쳤으나 간첩은 투항하지 않고 격투가 벌어졌으며 원완희는 자리를 떴다.

그러는 동안 추자초등학교 운동장 가까이로 옮겨졌으며 지서장의 싸움을 서 경사가 가로맡아 격투를 벌일 때 면사무소 직원 원학상씨가 간첩의 칼을 빼앗아 찌르는 등 완전히 제압하려는 순간 간첩은 수류탄을 꺼내었고 안전핀을 뽑았다.

서 경사는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터지지 않게 하려고 달려들어 껴안아 수류탄을 움켜쥐고 뒹굴고 있을 때 총소리가 나면서 서 경사가 맞아 쓰러졌다.

총은 원완희가 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순간 수류탄이 폭발하였고 원학상, 서병철 및 간첩이 동시에 폭사했다.

새벽에 간첩이 철수하는 길을 막고 있던 방위병 두 명이 간첩(원완희 외의 다른 1명으로 추정)의 총에 맞아 숨졌는데, 이들은 먼저 간첩을 발견하고도 방아쇠 잠금장치를 풀지 않은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기다가 도리어 간첩에게 총을 맞았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원완희와 다른 간첩 1명은 탈출하였다. 이 때 주민들은 경찰이 공명심을 앞세워 행동하다가 쉽게 잡을 수 있는 간첩들을 놓쳤다고 말하였다고 한다.(1999년 12월 10일 김동선씨 증언) 면사무소에 보관중인 간첩의 시체 사진에는 국부를 중심으로 허리와 다리의 일부가 없었다.

이를 '추자도간첩사건'이라 부른다. 반공탑은 이 때 이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분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탑이다.

높이 10m의 이 탑은 북제주군 관내 학생들과 주민들의 성금으로 사건 발생 1주년이 되는 서기1975년 5월 세워졌다. 탑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여 있다.


「여기 바람과 비와 눈보라와 파도와 국토의 남단을 지켜 온 대한의 파수 추자, 1974년 5월 20일 그 날 칠흑의 밤에 북괴의 무장간첩들이 향토를 유린했을 때의 우리의 파수들은 목숨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조국을 지키셨으니 故지방행정서기 원학상님, 故경사 서병철님, 故방위용사 변길만님, 故방위용사 조재선님 천년의 비바람과 눈보라와 파도가 지우지 못할 거룩한 이름들, 만년의 어둠 가운데서도 타오를 님들의 뜨거운 충혼을 여기에 새겨 기린다. 1975년 5월 20일」


서병철 경사의 묘는 노형동 제주시 충혼묘지 경찰묘역에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집필자 황경수)에는


《1974년 5월 20일 밤 11시 즈음 북한 무장 간첩 3명이 해안선을 따라 상추자도로 접근하여 상륙을 시도하려 하자 해안 경비 중이었던 남한 측 경비원이 “누구냐?” “손들어!”하고 수하를 했다. 그러나 북한 무장 간첩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무차별하게 총격을 난사했다.


무장 간첩들이 출현했다는 긴급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및 예비군들이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일대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무장 간첩들은 도주하면서 주택가 등 아무 곳에나 마구 총구를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우리 군경은 달아나는 무장 간첩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계속 교전을 벌였는데, 얼마 후 무장 간첩 1명이 우리 측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무장 간첩 2명은 야음을 틈타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라고 되어 있으나 틀린 내용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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