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신호유적....고산1리 자구내포구 도대불
상태바
[향토문화]신호유적....고산1리 자구내포구 도대불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8.22 08: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등대는 국가가 주체, 도대불은 마을 어부들이 주체'


고산1리 자구내포구 도대불

 
고산1리 자구내포구 도대불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자구내 포구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어로신호유적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 고산리_자구내도대불_상부

▲ 고산리_자구내도대불

옛날 등대가 세워지기 이전 뱃사람들의 아낙들은 비바람이라도 부는 밤이면 횃불을 들고 지아비를 마중 나가곤 하였다. 이것을 '갯불'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를 대신하여 1915년을 근간으로 제주의 포구에는 소위 '도대'라는 옛 민간등대가 1960년대까지 축조되었다.(한라일보 2010년 3월 12일 백종진·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글)

제주도의 바닷가 마을에는 옛 등대들이 남아 있다. 어원에 대해서 알아 보면


(1)도대불 ; ①돛대처럼 높은 臺를 이용해서 불을 밝혔기 때문에 돛대불→도대불이라 했다. ②뱃길을 밝히는 것이라 해서 道臺불이라 했다. ③일본어 '도우다이'에서 온 것 같다는 추측도 있다.


(2)등명대 ; 조천읍 북촌리 도대불 비석에 '燈明臺'라고 음각되어 있고, 화북 포구에도 ''燈明臺'라는 글귀가 쓰인 비석이 있었다. 북촌리에서는 비문에 '燈明臺'라고 되어 있어도 부르기는 도대불이라고 한다.


(3)관망대 ; 조천읍 신촌리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관망대'라고 한다.

그리고 여러 마을에서 밤에 조업 나간 배가 들어올 때 유도하기 위해서 연대 위에서 횃불로 불을 밝히다가 뒤에 도대불을 세웠다는 것과, 도대불을 세우기 전에는 긴 나무를 세우고 불을 밝혔다는 내용들이 전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도에는 도대불이 모두 18기 남아 있었다. 도대불은 '신호유적'이다. 마을마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재료도 처음에는 돌을 이용하였고 뒤에는 쇠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쉽게 부식되어 현재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석축한 도대불의 형태를 구분하면 ①원뿔형 ②원통형 ③사다리꼴형 ④상자형 ⑤표주박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언제부터 도대불을 만들고 사용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두모연대를 도대불로 사용한 점이나 별방진성의 치성을 도대불로 사용한 점 등으로 미루어 생각건대 연대·돌탑·성이 그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할 무렵부터 마을 사람들은 도대불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도대불이 현대식 의미의 등대와 다른 점은 축조 운영의 주체이다. 등대는 국가가 그 주체이고, 도대불은 마을 어부들이 그 주체이다. 어부들이 당번을 정하여 또는 특정인에게 위탁하여 점등과 소등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료로는 물고기 기름·솔칵·석유 등을 이용했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 304∼305쪽)

고산리 자구내 포구 선창에는 일제강점기에 선착장과 방파제가 만들어졌고, 도대불도 이 시기인 1931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당시 수월봉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자연히 일본인 어부들도 출입하게 되었다.
이 도대불은 현무암을 직육면체로 다듬어서 층쌓기 방법에 시멘트로 굳혀 아래 부분이 약간 볼록한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285㎝, 하단 너비 190㎝, 상단 너비 87㎝이다. 위에는 점등도구를 보호할 수 있는 조그만 누각 형태의 시멘트 구조물이 덧붙여졌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어 철제 또는 목제의 사다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료는 석유를 썼으며 전기 가설 전까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 306∼307쪽)

그러나 한라일보는 위 내용과 다른 기사를 실었다.


"일본 여객선이 항해할 때 너른 포구를 앞에 둔 차귀섬에 정박하는 일이 많았다. 이때 '도대'가 필요했다. 포구에서 차귀섬까지 불을 비추기 위해 '도대'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부산이나 목포에서 여객선이 올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산1리에 사는 고원준(86)씨는 고산리 옛 등대에 얽힌 기억을 그렇게 풀어냈다. 그는 포구에서 차귀도까지 오가는 배를 '종선'으로 불렀다. 차귀도에 머무른 큰 배에 실은 짐이나 선원 따위를 실어나르는 '심부름 배'였다는 것이다.


옛 등대는 어선의 밤길을 안내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제주의 해양 교류와 연관이 있었다. 고산리 옛 등대는 그같은 점을 방증하는 유산중 하나다. 고산리는 다른 지역과 달리 옛 등대의 건립 배경과 시기가 비교적 소상하다. 2000년에 발간된 '제주고산향토지'에 실린 한 대목을 보자.


"'돌등대'(도대불)는 중일전쟁(1937~1941)이 끝나갈 무렵인 1941년 현석찬이 목포화물선(고산-목포)을 취급할 때 자구내 포구 갯바위 옆에 화물을 쌓아두기 위하여 곳간(창고)을 만들고 화물선이 밤에 포구로 들어올 때 불빛을 비춰주어 안전항로를 할 수 있도록 자구내포구 축조공사를 맡았던 일본인 석공에 의하여 만들었다."


일본인 석공에게 마을의 등대 축조를 맡긴 사연은 뭘까. 제주 석공들은 돌로 등대를 제작할 노하우가 부족했던 것일까.

15년에 걸쳐 향토지 자료를 수집했던 고동희(62·제주시 삼도1동)씨는 "80대 중반에 증언을 해줬던 마을 어른들은 지금 돌아가셨다. 도대불 관련 내용은 향토지에 실린 게 전부다. 일본인 석공은 증언자가 한자로 이름을 알려줘서 기록해놓았는데, 어떤 이유로 그에게 축조를 맡겼는지에 대해선 모르겠다"고 밝혔다.


고원준씨도 "일본 사람이 주동해서 도대를 만들었다"고 했을 뿐 그에 얽힌 배경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임자를 정해 석유불을 켰는데 유리문을 달아서 열고 닫았다. 돌도 다듬은 모양이 아니라 지금보다 난잡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현재 남아있는 고산리 옛 등대의 등롱은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등불을 꺼내기 어려운 모양새다. 돌 재료 역시 말끔하게 다듬은 흔적이 있다. 고산리 옛 등대가 마을 노인들의 증언처럼 1940년대초 지금의 위치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동안 원형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라일보 2010년 3월 12일 진선희 기자)

우리 나라에 현대식 의미의 등대불이 처음 켜진 것은 1903년 6월 인천 팔미도등대이다. 제주도에서는 우도등대(등간)가 1906년 3월에 처음 불이 켜졌는데 이는 전국에서 여섯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