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임시로 주민들이 세운 학교..하귀2리 하귀중학원(⇒단국중학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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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임시로 주민들이 세운 학교..하귀2리 하귀중학원(⇒단국중학교)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4.29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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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당시에는 1학년 1개 학급에 학생 50명을 모집해 개원했다.

하귀2리 하귀중학원(⇒단국중학교) 터

위치 ; 하귀2리 1715-1번지(現 주영광교회)
시대 ; 미군정기∼대한민국
유형 ; 교육기관

하귀2리_단국중학교터(2002)

 


광복 직후 제주도에는 교육열풍이 몰아쳤다. 각 읍면마다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중학원도 설립되었다. 중학원은 정규 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지 못한 단계에서 임시로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이다.

하귀중학원은 1945년 10월 15일 하귀2리 학원동 출신 고창옥(초대 애월면 인민위원장)씨를 원장으로 6학년까지 수용하는 고등교육기관을 목표로 설립하였다.

현재의 학제와 비교한다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과정을 아우르는 교육의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바굼지오름 쪽에 교실을 짓고 운영하던 중 태풍으로 무너지자 교실은 하귀1구 공회당=향사(하귀1리 549-1번지)을 사용했고, 학생들은 다음해 8월 5일자로 1학년 수료증을 받았다.

설립 당시에는 1학년 1개 학급에 학생 50명을 모집해 개원했다. 학생은 하귀리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몰려들었다.

※高昌玉:1904∼1981. 호는 雲史, 제주고씨 典書公파, 高英三의 장남, 애월읍 하귀리 개물(학원동)에서 태어나 서울 사립휘문고보 4년 중퇴, 애월면 면사무소 서기로 피명, 사립 하귀초등교 개설에 헌신, 민족주의 이념이 강한 당시의 지성인이었다.

해방 직후 초대 하귀리 이장, 점차 사회주의운동에 동참하면서 후진육영에 뜻을 두어 1945년에는 사립 하귀중학원을 인가받아 바굼지오름(파군봉) 쪽에 校舍를 짓고 운영 중에 태풍으로 무너졌다. 학교 복구가 여의치 않아 서울의 사업가 조정구(趙鼎九)에게 학교를 넘기자 단국(檀國)중학교로 출범했다.

1947년 3·1시위에 관여, 미군정 재판에 의해 복역 중에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 출타 생활하던 중 서울에서 두 아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병사하였다.(제주인물대사전)

해가 바뀌고 학생이 늘어나자 자연히 교실이 모자랐고, 2학년은 미수동 공회당(하귀2리 1715-1번지 현 주영광교회)에서 수업을 받았다. 8∼9명의 교사들이 국어, 공민, 수학, 역사, 동식물, 위생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교사 중에는 사회주의 이론에 해박한 독립운동가 박영순 지사도 있었다. 강의는 지금의 대학 강의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하귀중학원 학생들은 1947년 3.1절 기념식 이전부터 좌익이 득세하였고, 경찰과 충돌하였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 날 벌어진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제주도 전역에 총파업이 벌어지고 미군정이 파업을 탄압하면서 제주도의 다른 지역이나 다른 단체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미군정의 검거를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그리고 삼일절 기념식 이후 고창옥 교장이 수배⇒체포되면서 전체 교사와 학생들은 크게 압박받았다. 1947년 8월 27일에 경찰은 돌연 하귀중학원생 5명을 체포했다. 당시 이 사건 내용은 제주신보(1947-08-30)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제1구 경찰서에서는 지난 27일 새벽 돌연히 애월면 하귀리 미수동에서 동리 중학생을 비롯한 초등학교 아동에까지 이르는 일대 검거를 단행했는데 경찰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무허가 집회, 무허가 삐라에 관한 증거 서류가 발각된 것이 원인으로써 피검자 10여명은 남로당 세포조직의 혐의자들이라 한다.〉

위 기사를 보면 검거 이유는 남로당 가입이었다. 그러나 당시 하귀중학원생으로 체포되었던 강태중(2003년 73세)씨는 3일 동안 구금되었다 석방되었는데 취조 한 번 받지 않았다고 했다.

강씨는 그 후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몰라 동료들과 소승내가 바다와 만나는 끝자락의 냇벵디 큰 바위 밑을 파 숨을 장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1948년 4·3 발발 후 하귀중학원은 단국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울(또는 함경도) 출신인 사업가 조정구씨가 단국중학교 인가를 받고 온 후였다.

이 과정에는 여러 의혹이 있으나 교사와 학생들이 경찰의 주목 대상이 되자 조정구씨가 미군정과 손을 잡고 인가를 따냈다는 설이 가장 믿을 만하다. 그는 조병옥이 든든한 배경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학교의 주도권을 쥐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단국중학교 구성원들은 4·3의 와중에서 대부분 입산하여 무장투쟁의 대열에 섰고, 1948년 11월 중순 제주도 전역에서 초토화작전이 시작되던 시기에 폐교되었다. 개교 당시 입학했던 학생이 1948년 8월 5일자로 단국중학교 교장 조정구로부터 수료장을 받고 4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있을 때였다.

1학년 학생이 수업하던 1리 공회당 자리는 현재 하귀1리 복지회관으로 새로운 건물이 지어져 있으며, 2학년생들이 수업을 받던 미수동 공회당 자리에는 귀일교회⇒주영광교회가 들어서 있다. 단국중학교는 현재의 귀일중학교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제주4·3유적Ⅰ, 제주큰동산 카페)

2008년에 발간된 『다시 하귀중학원을 기억하며』(제주4·3 구술자료총서5)라는 책의 구술자들은 당시 하귀중학원의 교육 내용에 사회주의 사상이 담겨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다수의 교사와 학생이 빨갱이로 지목돼 학살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작성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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