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도내에서는 처음 시도된 무력 항일투쟁..조수2리 김재형 지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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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도내에서는 처음 시도된 무력 항일투쟁..조수2리 김재형 지사 추모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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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애국지사는 고사훈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3월 3일 관덕정 거사 결정

조수2리 김재형 지사 추모비

위치 ; 조수리 3659번지 가족묘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조수1리_김재형지사추모비
조수1리_김재형지사추모비 전경

 


김재형 지사는 두모리 1311번지(용금로128-3. 지금의 한원리 지경임)에서 태어났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당하고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국권회복을 외치며 의병으로 나서게 된다.

제주의병항쟁은 1909년 2월 25일 제주군 중면 광양동 조병생의 집에서 제주의 젊은이들이 항일 비밀결사 모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날 모임에는 우국충정이 남달랐던 고사훈을 필두로 김만석과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조병상,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한영근 등 모두 10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나라를 강탈하려는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내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당시 이들이 작성하고 의병 모집 당시 발표한 ‘격문’에는 간결하면서 크나큰 애국충정이 흘러 넘쳤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라 은혜에 대한 충정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만약 자식으로써 부모의 곤궁함을 구하지 못하면 불효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하여 나서지 않는다면 불충이 되는데, 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교활한 왜적이 병자년 이래 감언이설과 강압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더니,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 눈앞에는 왜적의 무리가 강산을 짓밟고 있는데. 그대로 두면 이 강토를 송두리째 삼킬 것이요. 우리들은 왜적의 노예가 될 터이니 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으랴.

오호라 천도가 무심하리오 경향 각지의 충의로운 지사들은 국권 수호를 위해 궐기하였다. 우리 제주 백성들도 충성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고 자손만대에 조상의 무덤을 지키게 할 때가 왔도다.

피끓는 충의로운 지사는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해 나라의 국운을 회복하고 성은에 보답할 자는 의성을 같이 불러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는 데 삶과 죽음을 같이 한다면, 이보다 다행하고, 이보다 더한 충효가 어디 있으랴. 피끓는 충효지사들이여, 팔뚝을 걷어 붙이고 총궐기하라!〉

이들 10명의 애국지사는 고사훈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3월 3일 관덕정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의병장 고사훈 등 6명은 대정군 영락리와 신평리를 중심으로, 이중심을 비롯한 4명은 제주도 중면을 중심으로 의병 규합에 나섰다.

고사훈 등 애국지사들이 돌린 격문과 통고서를 접한 도민들도 이들의 의거에 고무돼 적극 참여하면서 대정의 영락리와 신평리에서만 각각 100명의 의병이 규합됐다.

또 두모리에서는 이장 김재형이 중심이 돼 출병준비를 갖춰나갔고, 대흘리는 물론 송당과 교래리 등에서 모병활동이 추진되는 등 거의 전도적인 모병활동이 이뤄지게 됐다.

김재형 지사는 본관은 김해이며, 1864년 12월 2일 부친 유향좌수 金戒良과 모친 전주이씨의 차남으로 두모리에서 태어났다.

제주군 구우면 두모리 이장으로 1909년 고사훈 등이 일으킨 의병창의에 호응하여 3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지역주민들을 규합하여 군제로 편성하기 위하여 2월 28일과 3월 1일 두모리민으로 도통기를 작성하고 도통장 6인과 통수 41인, 227인의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본인은 별동대장이 되어 의병군으로서 만일에 있을 해전에 대비하여 두모포에 정박중인 배 5척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고승천의 체포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제통장기(諸統將記)」, 「통수기(統首記)」, 「보고문(報告文)」 등의 서류를 지니고 있다가 3월 8일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당하였다.

압수된 사발통문에는〈왜인을 打殺함을 그 인민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의병을 모아 만인이 우리 조선의 옛 제도를 복구하자〉라는 내용이었다.

1909년 4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미수죄로 流刑3년형을 언도 받았다.(보훈처 공훈록, 추모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추모비 〈愛國志士님은 本貫은 金海이며 裁瀅 一名 哲鍊이다.

제주시 한경면 두모리 1311번지에서 부친인 留鄕座首 金戒良과 모친인 全州李氏 사이에 次男으로 高宗원년인 서기1864년 12월 2일에 태어났습니다.

公은 1909년 제주 구우면 두모리에서 향리 이장으로 제주의병항쟁의 주요 핵심인물로 고사훈 이중심 의병장과 함께 동년 3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지역 주민들을 규합하여 군제를 편성하기 위하여 도통기를 작성, 도통장 6명과 통수 41명, 의병 227명의 의병대를 조직하고 公 은 별동대장이 되어, 의병군으로서의 만일에 있을 해전을 위하여 두모포에 정박중인 배 5척까지 준비하고 주도면밀하게 의병의 대오를 갖추고 출병준비를 하다가 동년 3월 8일 경에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유배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에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4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公은 탐라고씨 사이에 봉경 봉언 봉화, 탐라양씨 사이에 봉추 4남을 두셨다.

孫은 하탁 하룡 하구 하원 하운 하생 복손 복순이 있으며, 曾孫은 용환 래수 래선이고 玄孫은 민 신 태연 소연 미가이다. 志士님의 뜻을 기리고 우리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하며 이에 公의 冥福을 빌며 이 碑를 세웁니다. 2016년 12월 일 제주특별자치도지사 建立〉

제주의병항쟁은 비록 모병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일제의 침탈에 대해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무력 항일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훗날 항일독립운동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으며, 무오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농민조합운동 등 일제 강점기 동안 이어진 항일운동에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작성 1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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