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봄맞이 꽃초롱, 히어리
상태바
[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봄맞이 꽃초롱, 히어리
  • 박대문(우리꽃 자생지 탐사 사진가)
  • 승인 2024.04.02 0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밀랍(蜜蠟)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꽃..종(種)으로서는 유일한 우리나라 특산물

봄맞이 꽃초롱, 히어리

히어리(조록나무과) 학명 Corylopsis glabrescens var. gotoana

 

따뜻한 봄날이 계속되면서 남녘의 꽃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초목에 생기가 돌고, 새움이 돋고, 메마른 가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꽃망울이 부풀어 오릅니다. 봄의 전령이라 불리는 이른 봄꽃들이 봄기운을 감지하여 꽃망울을 부풀리고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 안팎이나 마을 주변에 피는 개나리나 진달래꽃이 봄의 전령이거니 여겼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집 주변이나 마을이 아닌 깊은 산속이나 멀리 다른 지역의 봄꽃 소식까지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야생화에 관심이 높아져 동호인이 증가하고 인터넷이 생활화된 덕분입니다. 이 땅에 맨 먼저 봄소식을 알려준다고 여겼던 진달래나 개나리보다 훨씬 더 먼저 봄소식을 전해주는 봄꽃을 이제는 TV나 핸드폰으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봄꽃 소식은 남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남녘의 이른 봄을 알려주는 꽃 중에 그 이름이 다소 생소한 히어리가 있습니다. 꽃 이파리가 약간 두툼한 육질이면서도 투명한 듯한, 밀랍(蜜蠟)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꽃으로 마치 노란 꽃초롱을 닮은 꽃입니다.

밝고 따스한 봄 햇살 아래 활짝 핀 히어리꽃 무더기를 보고 있노라면 멀리서 희미하게 다가오는, 가물거리는 봄 그림자 찾아 노란 꽃초롱 켜 들고서 봄맞이 길을 나서는 행렬처럼 보입니다.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히어리꽃이 서울에도 피었습니다.

제가 히어리꽃을 처음 만난 것은 십수 년 전 이른 봄, 전남 고흥군의 영산(靈山)인 팔영산(八影山)을 오르면서였습니다. 정상을 찾아가는 산길에는 상큼한 봄 내음과 함께 한려수도를 스쳐오는 갯바람에 짭조름한 냄새가 배어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봄바람을 킁킁거리며 걷는 정상 오르막길에 희끄무레한 꽃 무더기 숲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히어리였습니다. 팔영산 정상 부근에 무리를 지어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산길 굽이굽이마다 나타나는 히어리꽃이 마치 봄맞이 길의 꽃초롱처럼 보였습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꽃송이가 영락없이 환하게 불을 밝힌 노랑 꽃초롱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어디서든 히어리꽃을 만날 때마다 ‘봄을 맞이하는 꽃초롱’으로 저에게 각인된 꽃입니다. 올해도 활찍 핀 히어리꽃을 만났으니 이제 봄맞이 길을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꽃초롱 물결과 같은 히어리꽃

 

이 꽃은 1924년 일본인 학자 우에키 호미키(植木秀幹,1882~1976) 씨가 송광사에서 처음 발견하여 알려진 꽃입니다. 벌집에서 나온 밀랍처럼 생긴 꽃이라 해서 ‘송광납판화’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66년 이창복 박사가 순천 지역 방언인 ‘히어리’라 개칭하여 학계에 발표하면서 ‘히어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히어리’라 했던 이유로는 이 지역에서는 흔한 나무라서 산길을 걷다 보면 ‘시오리’ 안팎으로 자주 만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설날 즈음에 꽃이 피므로 한 해를 연다는 의미의 ‘해여리’가 점차 ‘히어리’로 발음이 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후자에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히어리의 다른 이름으로는 생김새나 자생지와 관련하여 조선납판화, 송광납판화, 납판나무, 송광꽃나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히어리는 한국 고유종으로서 지리산 깃대종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조계산, 백운산, 지리산 등 남쪽 지방에서 처음 발견되어 알려지고 나서 뒤늦게 강원도 망덕봉, 경기도 광덕산, 경상남도 금산 등에서도 차례로 발견되었습니다. 한때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했던 종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도 자생지가 계속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꾸준한 자생지 보전과 현지 내 복원, 서식지외 보전기관 등의 다양한 종(種) 보전 노력으로 충분한 개체 수가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대량 번식에도 성공하여 2011년에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외국으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국외 반출 승인 대상 종입니다. 대량 번식이 가능하고 추위에도 강하여 전국에서 조경용, 관상용으로 많이 심고 있지만 그 자생지가 매우 한정적이어서 여전히 귀중한 우리 식물자원이기 때문입니다.

히어리 속(屬)은 세계적으로 중국, 히말라야, 일본 등 30여 종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 히어리와 비슷한 종(種)으로 일본산인 도사물나무, 일행물나무가 있는데 히어리는 이들보다 꽃이삭이 크고 수가 많으며 꽃자루에 털이 없습니다. 따라서 종(種)으로서는 유일한 우리나라 특산물입니다.

이름도 약간 이국적인 히어리, 학계에 알려진 당시에는 송광사 일대의 조계산, 백운산, 지리산 등 남녘에서만 자생한 것으로 알았던 꽃입니다. 지금은 중부지방에서도 자생지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경용, 관상용으로 널리 보급되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자생지가 아닌 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해를 새로이 여는 ‘해 열이’, 봄맞이꽃, 우리 꽃 히어리가 널리 보급되어 더욱 많은 사랑을 받는 봄의 전령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 개체 수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변함없이 소중한 것은 히어리의 자생지입니다. 히어리의 보급 확대와 아울러 히어리의 자생지 보전에도 더욱더 많은 관심과 보살핌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봄맞이 꽃초롱, 히어리꽃

멀리멀리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봄 그림자 찾아
봄맞이 나서는가.
노란 꽃초롱 켜 들고서.


살을 에는 찬 바람
기나긴 겨울밤 속에서
시린 눈에 어른대는
하얗고 노란
기다림의 꿈 망울들.

꽃떨기마다 멍울진
긴긴 기다림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그리움의 꽃초롱 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노란빛으로 타오른다.
봄맞이 꽃초롱, 히어리꽃



-끝-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