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몸이 사라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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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몸이 사라졌도다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2.01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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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마지막 헬레니즘의 몰락- 수학자 히파티아

 

히파티아 Alfred Seifert (1850-1901)

 

히파티아의 성장

히파티아(355~415)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인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다. 히파티아는 평생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 그녀가 아테네로 유학을 했다거나 로마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오늘날 그녀의 전기는 대부분 18세기에 형성된 헬레니즘 동경주의자나 신교의 학자들이 구교인 가톨릭을 매도하기 위해 그녀를 희생자로 부각시키기 위해 지나친 소설화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이 대부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제독과 군사령관이 있는 중심지로 동로마제국의 세 번째 도시였다. 히파티아는 밀폐된 하나의 우주인 그곳에서 지적,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뮤세이온과 도서관, 사원과 교회, 세라피스신전과 기독교 수사학자들, 의과학교와 유태인 랍비의 유태교회 등등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는 곳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집안은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신도시 이주정책에 따라서 이주한 가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연원에 대해서는 확인 할 길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수학자 테온이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풍부한 지적재산을 이어받았으며, 수많은 자료를 접하고 탐독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뮤세이온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녀는 매우 자유로웠으며, 유력한 관리와도 친분을 나누었고, 공공기관과 과학기관을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그녀는 존경을 누렸고 종종 새로운 기독교와는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355년경에 태어났다. 그리고 테온의 다양한 지적전통을 이었는데, 테온은 수학과 천문학의 대가였다. 테온에게 히파티아는 매우 중요한 학문의 동료이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공동연구에서 뛰어난 업적뿐 만아니라 아버지의 교육이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히파티아의 어버지 테온은 헬레니즘 문화를 사랑했다. 그의 그리스에 대한 애정은 종교적이며 문학적이었다. 그는 ‘헤르메스 트리스메지스투스’와 ‘오르페우스’의 저서에 주석서를 쓰기도 했다. ‘그리스 시문선’에 나오는 시들 중에 천문학적 주제에 대해서 쓴 시들이 대부분 테온의 시라고도 한다. 헤르메스가 쓴 시를 빼면 테온은 천문학적 주제와 우주의 행성들에 대해 거의 모든 시를 남겼다. 이렇듯 테온을 통해 히파티아는 헤르메스의 종교적 전통에 매우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은 알렉산드리아의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학자였고, 히파티아는 유년기를 무사이움에서 보내면서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탁월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녀가 쓴 책은 디오판토스의 산술에 대한 해설서,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에 대한 해설서, 톨레미의 대표작 알마게스트에 관한 해설서 등이 있고, 아버지 테온과 공동으로 저술한 유클리드 원론에 관한 해설서가 있다. 디오판토스의 산술은 주로 일차와 이차방정식의 풀이를 다루고 있지만 히파티아는 디오판토스의 풀이 외에 몇 가지 다른 풀이와 많은 새로운 문제를 해설서에 써놓았다. 이것들은 히파티아의 연구업적이라 평가되고 있다.

 히파티아에게 배운 사람들은 키레네, 시리아, 알렉산드리아, 테베, 로마 등에서 왔고 그들은 가문과 재산가, 권력자와의 연줄에 선이 있었다. 그의 제자에는 기독교도와 이교도 개종자들과 나중에 주교가 되는 사람이 2명이 포함되어 있었고 유대인들도 있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이 되는 기독교도 오레스테스가 다른 많은 이들을 이끌고 왔으며 서로를 ‘헤타이로이(동무)’라고들 불렀다. 히파티아의 제자와 모임멤버들은 종교적으로 성숙한 입장으로 비기독교인은 기독교도를 비판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도도 그리스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개종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종교문제로 개종이나 입교를 강요하거나 그것이 공부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반기독교적인 관점 때문에 그녀의 가르침에 혼란을 겪었다는 사람도 없다. 대표적으로 히파티아의 제자인 시네시우스는 나중에 기독교의 주교가 되는데, 그도 히파티아의 신플라톤주의적인 철학에서 종교적 영감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렇듯 히파티아에게 이교도 교육을 받은 그가 대주교 테오필루스의 축복을 받으며 기독교 여성과 결혼을 한 것만 보아도 당시의 히파티아의 제자들은 종교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지 않았다. 시네시우스는 북부리비아의 프톨레마이스 주교가 된다.

물론 시네시우스는 철학의 깊은 영향으로 신학에 대해 의구심를 품고 있었지만, 테오필루스 대주교나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그를 의심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히파티아를 존경했으며, 이교도적인 생각과 신플라톤주의적 가치관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생각을 지니지 않았다. 또한 히파티아도 그의 제자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적인 길을 걸어가는 데 대하여 스승으로서의 태도도 변하지 않았고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는 증거도 없다.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와 갈등이 없었고 지배계층의 존경을 받았으며 기독교인에게 호의적이었고 세라피스 신을 믿는 이교도에게도 그들의 숭배의식을 존중했으며 종교적 분쟁이나 논쟁에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고 오로지 진리탐구와 수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히파티아의 학생들은 그녀에게서 신적 정신의 현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이 신성하며 또한 그녀 존재자체가 신성하게 여긴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플라톤의 계승자이면서 교육자로서 성령의 은사가 임했으며 헌신적으로 소명을 이행하였다. 그녀는 철학의 신비를 밝히는 안내자였다.
그녀의 제자들은 이렇게 지혜와 정신적 권위를 지닌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의 신성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즐겁게 들었으며 그녀의 예언자적 강의 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히파티아의 수학교실.  2009년 개봉. 스페인영화<아고라>의 한 장면. 히파티아의 학생들은 그녀에게서 신적 정신의 현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이 신성하며 또한 그녀 존재자체가 신성하게 여긴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플라톤의 계승자이면서 교육자로서 성령의 은사가 임했으며 헌신적으로 소명을 이행하였다. 그녀는 철학의 신비를 밝히는 안내자였다. 그녀의 제자들은 이렇게 지혜와 정신적 권위를 지닌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의 신성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즐겁게 들었으며 그녀의 예언자적 강의 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히파티아와 철학

그녀는 내면의 자아로부터 우리 안에 숨겨진 눈을 이끌어내고 우리 안에 깊이 숨겨진 채 해방이 되기를 갈망하는 지성과 이성의 빛나는 눈이 열리기를 고대했다. 또 물질의 족쇄를 깨고 초월적 세계를 열어야 하며, 자연의 원천에서 출발하여 인간 그 자체의 신성함으로 깨우침을 얻도록 권고했다.

그녀는 '내면의 신성을 최초의 신성으로 끌어올리도록' 이끌었으며, 이렇게 신성한 안내자에 의해 지펴진 지혜의 불꽃은 ‘인지’의 커다란 불길로 변하고, 결국 플로티누스가 '아나고지'라고 부르는 영혼의 여행을 떠나 천상과 신성의 여행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철학적 명상은 계시와 성찰, 철학적 사유로 ‘최초의 존재’이며 ‘진정한 실체’를 경험하게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속적 이유로 멀어진 본래의 무상에 대한 완전한 경험을 완숙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며, 철학적 탐구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사물들과 세상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 근원을 명상하는데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또한 이러한 비범한 경험을 통해 삶의 방향을 본질적으로 전환시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이성에 의해 구체화되고 이성의 인지라는 도구를 통해 영원한 지혜를 추구하며 결국 고양된 지혜는 황홀경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차원으로 고양된 지혜는 최초의 신성이라고 부르는 유일자와 융합하면서 행복함은 지고한 것으로 승격된다고 설명했다.

히파티아의 제자들은 이러한 차원의 영적교육을 받았으며 이러한 신성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본성에 언제나 명상을 추구하도록 고양되는 속성이 늘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녀의 제자들은 물질존재차원의 변화하며 덧없는 아름다움을 지양하고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선에 대해서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것을 위해서 그들은 평생 인지력을 발달시키는 노력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에 따라서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다. 그러한 삶을 추구하고, 신에게 신의 지혜를 요구하라"라고 했던 것이다.

히파티아는 더 나아가 인지적 노력과 윤리성 외에도 아름다움을 얻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을 넘어 스스로 아름다워야 하며 완벽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러한 진실을 보는 눈이 약한 학생들에게는 몹시 엄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생 중 하나가 히파티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자 그녀는 생리대를 보여주며 여성의 몸이 물질적으로 하찮다는 것을 일깨웠다. 그녀는 그에게 "보라. 이것이 네가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사랑하지 않지."라며 육체적 관능성에 대한 혐오감으로 환상을 깨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생각은 ‘에로스의 깊은 의미’가 물질적 존재인 여체가 아니라 내면의 숨겨진 눈을 통해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는 심리적 훈육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신플라톤주의의 주장대로 몸은 ‘이미지’이며 ‘흔적’이고 ‘그림자’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이미지를 쫓아가면 아름다운 육체에만 매달려 지성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영혼은 매우 강한 성격에 불굴의 윤리적 정신을 지녔다고 생각된다.
그 학생은 그 후로 외설적인 물건(생리대)를 보고서는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변화되었으며 '소프로시네(절제)'라는 자제의 미덕을 습득하는데 노력했다고 한다. 소프로시네란 피타고라스학파의 하르모니아(조화)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플라톤도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의 조화를 ‘절제’라는 미덕으로 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소프로시네(절제)와 디카이오시네(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녀가 누렸던 존경이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바로 소프로시네를 완벽히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히파티아의 학당에서는 이렇듯, 세속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윤리적으로 엄격히 제한했으며, 감정과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들어서 진정한 해방이 되기를 원했다. 아파테이아란 스토아철학자들이 지나친 쾌락은 고통으로 연결된다고 본 관점을 따른 것으로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일컷는 말이다. 스토아주의에 동조했던 아우렐리우스도 포근한 침대를 멀리하고 딱딱한 바닥에서 잤으며 오락인 검투사경기나 마차경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히파티아는 저급한 지상의 사물을 경멸하고 명상과 도덕규범, 본원적 윤리의 회복, 초월적 형상인 최초의 신성과 융합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지상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균형 잡힌 인간다움을 끌어올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던 그녀가 존경을 받은 것은 당연해 보이는데, 그러나 그녀는 제자들의 세속적 결혼과 명예를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적 금욕과 순결의 미덕은 그녀의 성스러운 명성을 가져왔지만, 제자들의 세속적 삶과 그녀의 철학적 윤리가 잘 조화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절제와 명상, 성스러운 이성적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히파티아는 죽을 때까지 처녀로 있었다. 행동은 온건했고, 옷차림은 여성스러운 옷보다는 경건한 철학자의 망토를 걸쳤다. 금욕적이었으며 절제와 예의를 갖춘 이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제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자신의 행동은 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신 앞에서 겸허해지고 신과 융합함으로서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그녀는 제자들에게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테온과 히파티아. 2009년 개봉영화 <아고라>. 수학자 테온의 딸인 히파티아는 아버지의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그녀는 깊은 학식과 논평으로 아폴로니우스와 디오판투스 기하학을 명료하게 설명했고, 플라톤과 이르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르쳤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고 지혜가 무르익은 이 겸손한 처녀는 남자들의 사랑을 거부하고 진리와 결혼하였다고 스스로 말했다고 한다

수학자 히파티아

히파티아는 윤리와 철학 외에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수학은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도구였는데, 수학적 명제의 진실은 인식론의 영역을 고양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반법칙을 통한 이상적 실체의 근원을 학생들에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신성한 기하학'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강의는 성스러운 원리들을 이해하게 하는 방편이었으며, 교우관계에도 적용하는 인간학이었다.

수학 중에서도 천문학은 그 자체가 성스러운 지식의 형태로 간주되어 천체관찰 도구나 천측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천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천체 그 자체가 신비로운 경험의 공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학생들이 마음 안에서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과학이야말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녀가 서클에서 이끌었던 철학의 신성한 의식은 전통적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수학자와 기하학자, 천문학자들도 찾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것이었다. 인류최초의 여성수학자는 사실 과학의 방편을 활용한 지혜의 구도자이며 참 진리를 찾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천문학이 산수와 기하학의 도움을 받아 명쾌하고 분명한 논증을 이끌어 낸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래서 천문학과 수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수학자였지만, 당시의 모든 세계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전승, 지혜와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철학과 융합종교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히파티아는 그녀의 아버지가 큰 관심을 가졌던 유클리드와 아폴로니우스를 토대로 기하학의 원리를 제시했다. 아폴로니우스는 아르키메데스보다 약 40년 뒤에 활약한 수학자로 원뿔곡선에 대한 연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산수에 대해서는 산학의 천재인 디오판투스의 논문을 이용했고, 수학적 진실을 위해서 프톨레미를 강의했다. 프톨레미의 '수학대계'는 치밀함과 우아함의 대명사로서 코페르니쿠스가 영감을 얻은 천문학의 표준서였다. 히파티아와 그녀의 아버지 테온은 프톨레미의 저서에 주석서를 썼을 정도로 해박했다.

또 그녀는 피타고라스의 수학도 가르쳤는데, 신플라톤학파는 피타고라스가 플라톤과 같이 성스러운 인간이며 도덕적 권위자로 숭배되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히파티아가 철학자보다 수학과 천문학자로서 더 유명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수학과 천문학은 인식의 궁극에 이르는 중간단계로 보았을 뿐이다. 그녀에게는 존재철학과 관련된 핵심과제가 인식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과학을 통한 철학자라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훗날 5세기의 역사가인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사’에서 히파티아가 높은 경지의 학식을 소유했으며, 당대의 높은 철학자들을 능가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녀는 플로티누스에서 이어지는 플라톤 학파를 계승했고, 철학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훌륭하게 전수했다고 평가했다.

이 시기의 다른 철학자들의 활약이 별반 없음을 고려해 볼 때 그녀의 지위는 다른 철학자를 능가한다는 평가가 타당하다고 보인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가 신플라톤주의 학교인 뮤세이온에 별도의 철학자 서클을 지도했다고 하는데, 이는 공공의 부분이 아닌 사적인 관행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그녀가 철학자의 망토를 걸치고 도시 한 가운데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공연히 설명했다고도 한다. 이는 그녀가 그 도시의 정식적 철학교사로서의 위상을 가졌는지, 견유학파처럼 거리의 설교가였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그녀는 강단에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강의를 하였지만, 또 때로는 폭넓은 대중들의 요청에 따라 공개된 강연도 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녀는 강연을 그녀의 집에서 행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시의 유력자들도 방문이 이어졌다. 시기에 찬 키릴루스 대주교는 바로 이러한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중들은 집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대신 히파티아가 집을 나서면 많이 사람들이 그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면 그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도, 강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였다.

정식 학생들이 아닌 대중들도 수학과 천문학을 궁금해 했고 세상에 대한 진리를 알고 싶어 했다. 점차 그녀는 그녀의 집 앞에서처럼 대중강연장에서 강의를 했고, 때로는 마차를 타고 가서 그 지역의 도시공무원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녀는 강의를 정해진 장소에서 주로 행했다고 한다. 친밀하고 깊은 유대가 필요한 철학의 특성상 대중적 강연은 스승과 제자의 애정과 애착, 헌신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학생들은 스승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다. 그들은 히파티아를 철학스승이자 은인으로 불렀다. 그들 중 일부는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했고 누이라고 불러 친밀함을 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도취되어 신들이 그들을 모아주었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학생은 자신의 고향을 버리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적 만남은 아테네가 몰락하여 철학에서 멀어진 시기에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히파티아의 제자이며 신플라톤주의 입문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단순한 동료로서가 아니라 행복한 동반자인 동무, 즉 도반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가장 축복받고 성스러우며 신들의 사랑을 받는 인간인 히파티아의 동무가 되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칭부터 남달랐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표현했으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유대감을 나타내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헤타이로이’였던 것이다.

내면의 최상의 상태인 지성을 통해 결합된 사이였기에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네 명이 모여서 피타고라스의 사각형원리에 따라서 연합체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들은 철학의 신비에 대해 공동의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비밀로 깊이 간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합체 서클이 우주의 법칙과 상호의존성을 반영함을 확신하고 비밀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물론 정신적 수양으로 선출된 엘리트의식의 한 발로였지만, 철학이 군중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렵고, 심지어 신성함에 대해 경멸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에 신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군중에게 비밀로 한 것은 히파티아의 제자들에게는 필연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축복받은 여성의 동무로서 그들의 정신적 귀족공동체의 구성원을 서로 존중했다. 그들 중에 여성은 없었다.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도 여성에 대한 경멸의식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그러한 의식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공적인 부분에서도 일반 여성을 뛰어넘었다.

한편 그녀와 제자들은 기독교의 수사들을 싫어했는데, 그들은 헬레니즘을 싫어하고 허무맹랑한 믿음을 가진 광신자이며 인문적 교양이 결여된 야만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히파티아의 견해와 그녀의 제자들의 우월감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기독교중심사회에서 점차 고립적이 되며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히파티아는 신플라톤학파의 은밀한 교리와 신플라톤학파의 성경인 '칼데아의 신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철학서들이 텍스트로 읽혔고 히파티아의 아버지에게서 전수된 다양한 신비서들도 읽혀졌다.
그렇다고 그녀가 종교적인 주술과 숭배의식의 비교(秘敎)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술을 배우거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단지 문화적 헬레니스트였던 것이다.

그녀가 마녀였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말 그대로 광적 히스테리이다. 그녀는 그리스 신들과 이집트의 신들을 진정한 인간본성에서 해석한 인문학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강의가 윤리적이고 신에 대한 존재성에 대해서도 감정적 인지적 경험의 고양을 위한 대화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지적 고양을 위해 기도하고 명상하며 성가를 불렀다. 또 때로는 당시에 제대로 편찬되지 않았지만, 기독교의 텍스트들도 읽고 낭송했다. 그녀의 학생 중에는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다수 존재했기에 그러한 관행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히파티아의 사조직은 아마도 그들의 지식과 체험의 깊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배타주의나 엘리트주의식의 비밀의식을 위하기보다는 탐구적이고 신성한 분위기에 물든 정신적 향기가 그러한 비밀모임을 만들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지속적인 수행으로 꾸준한 명상과 영혼의 정화, 황홀경의 체험과 독특한 정신적 경지를 지녔기에 무아경에 이르렀던 체험집단의 구심력을 형성했으리라 본다. 그들은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라고 불렀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그러한 경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교집단의 악마적 행위라고 단선적인 편견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는 자기들만이 아는 세계를 유일한 진리라고 믿고 그것에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결국 히파티아를 그들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만다.

 

히파티아의 최후. Charles William Mitchell. 1885. 
광적인 기독교 신자들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히파티아를 습격하여 캐사리온 교회로 끌고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도자기 파편들로 그녀를 찢어 죽였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녀는 죽어갔으며, 그녀의 시신은 도시 밖의 키나론의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태워졌다. 이 그림은 교회의 제단앞에서 벌거벗긴채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 작가들은 광신도들이 히파티아를 알몸으로 벗기고 관음적인 행위를 하였다고 묘사하지만,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볼때 그녀가 살해되었을 당시의 나이는 60세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파티아의 살해와 중세암흑의 시작

서기 385년에 알렉산드리아에 테오필루스 대주교가 부임했다. 그는 이교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고 다른 이교의 종교숭배의식을 말살하려고 했다. 그러다 기독교도들이 이교도 사원을 점유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테오필루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 숭배의식의 거점인 세라피움을 타격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세라피움은 그리스신과 이집트신의 융합신인 세라피스신의 신전이었다. 때마침 숭배의식을 금지하는 테오도시우스의 칙령이 391년에 포고되자, 391~392년에 세라피움을 기독교도들이 포위하고 공격했다. 그러자 세라피움을 지키는 세라피스교도들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다가 무기를 들고 기독교도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살상했다.

그러자 기회를 잡은 테오필루스는 관청과 군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황제는 칙령을 내려 이교도들은 사원을 버리고 떠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죽은 기독교도들은 순교자로 포고되었다. 세라피움은 이제 기독교회 소유가 되었고 그들은 세라피스 신의 동상을 산산 조각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지도자들은 전통적 종교를 지지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물건과 숭배의 상징물들을 수호했다. 그들 중에는 세라피움의 저항운동을 지휘한 그리스어문학 교사인 암모니우스와 헬라디우스, 시인 팔라디스와 클라우디안도 있었다.

세라피움을 수호하는데 가장 강력히 저항한 사람은 신플라톤학파의 올림피우스였는데, 그는 철학자의 망토를 입고 진두지휘했다. 그는 기독교도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에게 희생된 이 중에는 기독교수사학자인 게시우스도 있었다. 올림피우스는 미남에 전통적인 의식을 잘했고 신들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했다고 한다.

히파티아는 기독교 대주교인 키릴루스에 맞서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을 도와 정당을 만드는데 노력한다. 그러나 광신도들을 등에 엎은 키릴루스 대주교는 결국 히파티아를 타겟으로 삼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간다. 사진은 영화<아고라>의 스틸컷

그러나 세라피움이 붕괴되자 암모니우스와 헬라디우스, 클라우디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도들이 사원을 점령하자 올림피우스는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클라우디안은 로마에 가서 정착했고 팔라디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남아서 그리스문학을 가르쳤지만 급료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히파티아가 세라피움의 저항에 직접 가담한 기록은 없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2009년 개봉한 영화 '아르고'에서는 그녀가 저항운동을 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녀가 세라피움 안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녀는 그 이후로도 철학교육에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이교도와 기독교도 중에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392년의 세라피움 사건이 있은 후에 서기 412년 테오필루스가 죽을 때까지 그녀는 이러한 사회 종교적 상황과 아버지의 과학적 분위기에서 학생들과 담론을 나누며 지냈다. 20년이 지나는 동안 테오필루스는 ‘교회의 파라오’라는 별명답게 가혹하고 권위주의적인 행동으로 전통 적 종교의 신자들에게 분노를 샀다. 그는 수도사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고, 콘스탄티노플의 크리소스톰 주교와 동방의 여러 교회집단으로부터도 불만을 샀다.

그러나 테오필루스는 히파티아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고, 그녀도 신플라톤주의자로서 그녀의 연구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적 독립성을 지녔으며 교회에서도 관용적으로 존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테오필루스의 조카인 키릴루스가 성 마르코의 주교로 선출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키릴루스는 그의 삼촌보다 강경한 기독교중심주의자로 이교도에 대해서 철저한 응징을 한 행위들로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가톨릭에서 그는 영웅이지만, 무자비하고 권위적이며 충동적이고 권력욕에 가득한 그의 행동은 이집트와 헬레니즘 신봉자들에게 강력한 저항을 받게 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키릴루스의 등장에 긴장했다. 교회도 두 파로 갈려 부주교였던 티모시 파와 키릴루스 파로 갈렸다. 3일간의 싸움으로 승자가 된 키릴루스는 412년 10월17일 대주교로 취임했다. 그리고 그는 제일 먼저 정통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집단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위한 싸움으로 그는 영적 경건성을 중시하던 로마의 장로 노바티안의 신도들을 축출했다. 그들의 교회를 폐쇄하고 예배도구를 압수하고 주교의 권리도 빼앗았다.

그리고 이어서 유태인들을 공격했다. 유태인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에 무용을 보러 갔고 그곳에서 기독교인들과 다툼이 일어났다. 이 자리에는 총독인 오레스테스가 연설 중이었는데, 유대인들이 청중가운데 키릴루스의 첩자가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첩자들은 도시에 혼란을 일으키고 황제특사의 활동을 미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오레스테스 총독은 유대인의 불평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키릴루스의 아첨꾼인 히에락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선생지위를 박탈할 것을 요청했다. 그가 밀고자로서 혼란의 주범이라는 이유였다. 오레스테스는 주교가 황제의 특권을 범한데 대해 평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히에락스를 체포하여 고문하도록 했다.

제독의 이러한 사태에 키릴루스는 대노했다. 그는 이에 대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유대인들을 위협했다. 협박에 분노한 유대인들은 매복하였다가 기독교인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또 유대인들은 성 알렉산더교회가 불탄다고 경보를 발령하여 교회를 구하려고 달려 나온 기독교도를 공격하여 죽였다.

그러자 키릴루스는 대규모의 기독교군중을 모아서 유태인지역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유태교회를 둘러싸고 재산을 약탈하게 했고, 도시 밖으로 유태인들을 내쫒았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할 때 강제로 이동되었던 유태인들은 모두 이때 대부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게 되었다.

키릴루스는 이렇게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주교의 조치에 분개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키릴루스는 오레스테스에게 신약성서를 보여주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길 바랐고 관용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대주교와 타협을 거부했다.

키릴루스 대주교.  작자미상. 러시아 노브고로드 역사예술박물관. 키릴루스 대주교는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히파티아의 살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키릴루스는 그의 정치력에 한계를 느끼자 오백 명의 수사를 동원하여 오레스테스를 이교도라고 비난하고 모욕적인 말을 하게 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사 중 하나인 암모니우스는 오레스테스의 머리를 돌로 내리쳤다. 피를 흘리는 총독을 두고 수행원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달려와 오레스테스를 구했고 수사들은 달아나버렸다. 암모니우스는 잡혀서 오레스테스에게 잡혀와 고문을 받고 숨졌다. 이러한 충돌로 키릴루스와 오레스테스는 대립이 심화되었다.

히파티아는 이 가운데 오레스테스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키릴루스와 오레스테스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이 히파티아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사실 그녀는 키릴루스 이전에는 시민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가 조화롭게 운영되어 큰 불만이 없었다. 교회도 그녀의 독립성을 존중했고, 그녀의 철학을 관용했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었고, 사람들은 온 도시가 존경하는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도시는 그녀를 방관자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그녀의 지지와 적극성으로 414년경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지지정당을 만들게 되었다. 여기에는 유태교의 지도자들도 도움을 주었다. 유태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탄생 때부터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고 문화적으로도 큰 기여를 한 집단이었다. 그리고 히파티아는 그 도시의 주요한 세력가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키릴루스에 반대하는 기독교 지도자들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레스테스총독도 기독교인이고 기독교국가의 대표로서 통치하고 있었다. 히파티아의 지원자들도 기독교인 엘리트들이어서 키릴루스는 궁지에 몰렸다. 히파티아는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범그리스권, 범로마권의 지지를 받는 존경받는 유명인사였다. 그녀의 제자들은 명문집안이었으며, 제국과 교회의 고위직에 포진해 있었다. 히파티아의 영향력은 콘스탄티노플과 시리아, 키레네와 로마까지 미쳤다.

키릴루스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권위의 힘이 두려웠다. 그들은 약점이 있었고 오레스테스와 싸워서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태인 거주지를 파괴할 때 도움을 받았던 도시빈민들을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빈민과 보통의 시민은 히파티아의 권위나 명망을 몰랐다. 다른 지역에까지 유명했던 그녀지만 그들에게는 그리 유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종교를 보존하고 옹호하는 저항운동에서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이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키릴루스는 그래서 기독교제국법의 처벌조항에 따라 히파티아가 흑마술을 부린다고 소문을 냈다. 이 소문은 광신적 기독교도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마녀가 기독교도인 총독과 대주교를 이간질시킨다고 생각했다. 히파티아가 금지된 마술을 행하고 천체를 연구하며 악기에 전념하는 지옥의 사자라는 이미지가 널리 유포되면서 그녀의 천문학 연구가 바로 점성술사이며 마녀의 증거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키릴루스의 조작은 히파티아가 악마의 주술을 사용하는 위험한 마녀로 둔갑하게 된다.

기독교광신자들은 그래서 히파티아가 오레스테스 총독을 꼬여 교회도 안 나가게 하였고 기독교신자를 무신론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여성철학자를 죽이기로 결심한 폭도들은 페테르(세례명으로 베드로)의 주동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페테르는 성서낭독자이며 하층성직자로 추정된다.

그들은 415년 3월 사순절기간에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히파티아를 습격했다. 마차에서 끌어내린 그녀는 캐사리온 교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도자기 파편들로 그녀를 찢어 죽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도시 밖의 키나론으로 가지고 가서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태워졌다. 마녀를 죽이는 행위는 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히파티아에 대한 키릴루스의 정치적 암살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대주교는 정치적 반대파의 핵심적 인물을 처치하였고 힘을 잃은 오레스테스도 황제에게 소환되었겠지만 그 후의 경위는 잘 알 수 없다. 히파티아의 잔혹한 죽음과 마녀재판의 광기에 두려움을 느껴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했을지도 모른다. 키릴루스는 그 도시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그를 반대하는 총독도 임기 내에 이렇다 할 갈등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알렉산드리아의 시의원들이 이 사건으로 황제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키릴루스의 옹호자들이 뇌물로 무마했다. 교회는 오히려 키릴루스를 이교도와의 투쟁에 앞장선 이로 보고 후에는 마지막 우상숭배의 유물을 쳐부순 성인으로 치켜세웠다.

히파티아의 살해를 정당화한 이후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인 풀케리아의 섭정시기와 아우렐리안의 제독부임과 더불어 이교도와 유태인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시의회는 지속적으로 탄원을 제출하여 416년 10월 키릴루스의 ‘파라볼란’의 권한을 빼앗는 칙령을 받아냈다. 파라볼란은 알렉산드리아교회에 고용된 건장한 젊은이들의 단체로 그들의 임무는 병자나 불구자, 무숙자들을 모아서 병원이나 교회나 구빈원에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군인으로 대주교의 실질적인 호위대였다. 그들은 많을 때는 인원이 800여명에 달했는데, 대주교가 선택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이 바로 히파티아를 납치 살해한 주역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원래 도시의 원로나 고관계층이 회원으로 있었지만, 키릴루스는 극빈층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파라볼란은 헛소문을 퍼트린 주역들이고 이교자들을 공격할 때 수사들 주변에서 도운 사람들이었으며, 유태인들의 숙소를 공격한 폭도의 주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난으로 천대받았으며 에페소스에서 난폭하여 쫓겨 난 자들도 다수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핵심적 신도들로 교회에 맹종했으며 히파티아의 가치관과 철학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교회에 소속된 하층출신들의 파라볼란 조직이 주동하여 맹목적 기독교를 숭앙하던 이들에 의해 히파티아는 살해되었다. 기독교와 키릴루스는 자신들의 가치관인 기독교적 휴머니즘과 도덕적 덕목을 위반했다.

키릴루스는 야심과 질투심에 의해 권력의 정치적 주도권을 위해 살해를 저질렀고, 기독교 중심적 강경파로 이교도를 배척하고 몰아내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대주교의 편협한 행태는 결국, 그리스의 정신과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라는 가치를 기독교의 암흑으로 대체했다는 평가를 낳았고, 알렉산드리아의 하층민들의 집단적 광기를 포함해 기독교회의 불명예를 안겨준 치욕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히파티아 Julius Kronberg. 1889. 히파티아는 평생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 그녀가 아테네로 유학을 했다거나 로마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는 것은 독일의 작가 ‘아르눌프 지텔만’의 역사소설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사실상 증거는 없다.

히파티아의 살해는 지혜와 윤리적 미덕으로 칭송받았던 그리스정신의 상징인 여성 철학가요 수학자를 잔혹하게 난도질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범죄이고 불명예이다. 그런데 그 후의 기록 어디에도 법적 처벌과 사람들의 항의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가르침을 받은 그녀의 제자들도 역시 침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먼저 그녀의 가르침이 비교(秘敎)주의적 가르침으로 매우 비밀스러웠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4세기에는 벌써 기독교가 범 그리스 세계와 로마를 넘어 유럽으로 기독교가 득세하고, 그러한 정세 속에 히파티아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기에 좋지 않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교회는 더더욱 이 사건을 후세에 남기는 것을 싫어했다. 지성을 겸비한 철학가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용과 이해심으로 호의를 지녔던 지식인 여성을 마녀로 몰아 끔찍한 살해를 했던 사실은 범법자의 보호차원을 넘어 그 교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특히 윤리가 미덕인 종교인들이 민낯을 드러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과 조화로운 우주관, 자유로운 사고와 자유로운 이성, 자유로운 탐구를 가로막아선 신흥기독교의 무지몽매한 상징적 사건으로 남아있는 히파티아 살해사건은 결국 새로운 역사의 주인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웠다. 새로운 질서인 기독교는 하층민들의 구원을 등에 업고 기존질서를 재편했다.

헬레니즘세계는 물론 철학과 민주주의, 인간화된 신들의 인간적 가치관의 세계이다. 히파티아가 심취한 철학은 플라톤이며, 신플라톤주의의 비교의식과 닿아있다.

결국 결과적으로 히파티아의 살해사건은 상징적으로 헬레니즘을 살해한 순교자로서 히파티아를 역사에 새겨놓았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시인 ‘샤를르 르콩트 드 리즐’은 ‘히파티아’라는 시집에서 이렇게 적었다.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몸은
그리스의 청명한 하늘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도다.

그녀는 홀로 변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다네
죽음은 떨리는 우주를 흩트려 놓을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히 그녀의 불길로 눈부시고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다시 태어나
세상은 여전히 그녀의 흰 발아래 엎드려 있다네.

 

히파티아는 60세 전후에 광신적인 기독교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녀는 그리스정신과 철학의 상징이며 신의 암흑이전에 인간의 깊은 이성적 통찰과 인식의 최고의 경지를 설파한 인본주의자의 종언이다. 결국 플라톤의 정신은 스러졌고 아프로디테의 몸은 그 아름다움을 난도질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18세기에 다시 재조명되었고, 치욕적인 기독교의 역사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것은 신으로서의 영생을 기약하는 크리스트의 부활과는 다른, 인간들의 내면의 등불을 지피는 부활이요, 맹목적 신앙이 죽이지 못한 주체적인 이성의 부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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