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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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13)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08.21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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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아리랑의 핵심 개념에 대한 이론적 고찰-3(제5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다섯번째 주제는 '아리랑의 핵심 개념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Ⅳ. 아리랑의 본질에 대한 고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아리랑 연구의 내용 중에서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통해 본질적인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주요한 역사적 기록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본질적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4.1 기록에 나타나는 본질

근대의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중에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 와다텐민(和田天民), 이치야마 모리오(市山盛雄) 등은 매우 특별한 노래로서의 아리랑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내국인에 의한 연구로는 최영년,, 최남선, 이광수, 김소운 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요 연구로서의 아리랑이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암호 사상⋅정치 상황⋅뱃노래

근래에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2014년)라는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1918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내용이 1992년에 영문으로 간행되었고, 2014년에 국문으로 번역 출판된 것이다.

구슬픈 장안사의 아리랑, 1918년 가을.

우리는 커다란 일주문을 통과하여 영원한 안식처라는 뜻의 장안사로 들어섰다. 저녁상은 한 참을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저녁상이 들어왔다. 이미 늦은 식사였고, 너무 배가 고파서 우리는 젓가락을 들고 말도 없이 밥만 먹었다. 그때 바로 옆방에서 낮고 구슬픈 가락이 들려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저 곡은 옛날 조선 실향민의 노래라오. 왠지 나는 저 노래만 들으면 <볼가강의 뱃노래>가 연상되던데, 아무튼 이 노래의 가사에 대한 해석은 수십가지가 넘소. 어떤 가사를 붙여 부르든 곡조 자체에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오. 일종의 암호 같은 거랄까.” 브루스가 설명했다.

그 당시에 이미 1926년 영화 아리랑에서 불리던 것과 똑같은 아리랑이 강원도 금강산 장안사에서도 불리고 있었다. 가사의 형태와 관련하여,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에서 처음 만들어 졌다는 주장이 학계에 공인되어 있었는데, 이 기록의 출현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이전에 불리고 있던 다양한 아리랑 중의 변이형일 뿐이다.

당대인들은 아리랑을 암호문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정치적 상황을 나타내고, 뱃노래의 성격이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상황은 『매천야록』에 나오는 아리랑(阿里娘)이라는 표기는 물론 헐버트가 뱃놀이의 전통에 기인한다는 기록과도 관련이 있으며, 님 웨일즈(Nym Wales)가 '아리랑(Song of Ariran)'(1941년)에서 제기한 비밀결사의 노래(secret revolutionary version)라는 기록과도 관련이 있다.

 

허사 아닌 실사⋅신성염곡⋅가극의 노래

아리랑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자료 중의 하나는 매천야록이다. 1894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내용 중에는 아리랑의 뜻과 성격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優伶]들을 불러들여 아리랑 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고 있다. 타령(打令)한다는 말은 민간에서 가극하고 노래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아리랑이 뜻 없는 후렴구가 아니라 실사이며, 여자를 뜻하는 랑(娘)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타령(打令), 신성염곡(新聲艶曲) 등의 표현을 통해 노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고, 연곡(演曲), 우령(優伶), 궁중의 곡연음희(曲宴淫戱)등의 표현을 통해 가극으로도 상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은 가극 속에서 불린 노래이다. 당시 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었다.

 

주식인 쌀밥과 같은 위치⋅뱃노래⋅한(恨)⋅고난 극복

미국인 헐버트는 「조선의 성악」, '조선 노래 모음집(The Korea Repository)'에서 아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조선의 성악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대략 782가지 종류의 단가형식으로 된 대중 애창곡인데, 이들 노래들은 발음이 아주 부드러운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총칭된다. 일반 조선 대중들에게 이 노래는 조선 음식중 주식인 쌀밥에 해당한다.

즉 다른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든지 아리랑을 쉽게 들을 수 있다. […] 또한 이 후렴구 노랫말은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조선 사람들의 풍습을 보여준다. […] 노랫말의 범위는 전설, 자장가, 음주가, 가정생활, 여행, 사랑 등 그 주제가 다양하다. 조선인들에게 있어 아리랑은 서정적이고, 교육적이며, 시사적인 측면들이 다 들어있는 노래이다. (文學博士 趙容晧 譯)

 

조선의 성악에서 아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식중 주식인 쌀밥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가장 두드러진 대중 애창곡이며, 단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오랜 기간 불리어 왔으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고, 수많은 변형이 가능하다.

후렴구는 뱃놀이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많다. 아리랑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보이며, 주제는 다양하다. 아리랑을 주식인 밥에 비유하고 있다. ‘아리랑은 쌀’이라고 오역 하고 있는 자료들이 있는데, 수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후렴구는 뱃놀이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많다고 하였는데, 1912년에 채록된 가사들을 분석해 보면, 아리랑 노래의 가장 본질적인 소재는 물[水]이나 배[船]와 관련이 있다.

슬픈 음조⋅중류층 애호⋅조선을 대표⋅감동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는 헐버트가 채보한 곡조를 바탕으로 아리랑을 표현하였다. 노래에서 느껴지는 무량한 감개를 한역하여 아란곡(阿蘭曲)이라는 형태의 시로도 표현하고 있다.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슬픈 음조의 노래라는 것은 헐버트의 기록과 동일하다. 아리랑은 깊은 감동을 주는 노래로, 이미 조선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후정화⋅애조

1921년, 와다 텐민[和田天民, 久保田天南 畵, '조선의 향기(朝鮮の匂ひ)', 京城:ウツボヤ書籍店, 1921]은 아리랑의 후정화적 성격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一. 아리랑>

온돌(溫突) 지피는 연기 온 동네 가득하고, 조선 약주(藥酒)의 짙은 내음 코를 찌르는 초저녁 무렵의 주막집[酒家] 앞을 지나는 사람은 종종 맑고 가는 음절의 장단으로 들려오는 아리랑의 노래를 듣게 된다.

슬픈 가락이 노래 속에 가득하고 여운은 끊어질듯 말듯 길게 늘어져, 어쩐지 사람을 비참하고 처량한 느낌에 빠뜨려 견디지 못하게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리랑 노래는 이전에 민비(閔妃)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으로 당시 궁녀(宮女)들 사이에 한창 유행(流行)하다가 이윽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널리 불리어졌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후정화(後庭花)」에 비유하기도 했다. 후정화란 진(陳)나라가 망할 시기에 불리어진 애조(哀調)를 띤 곡조의 노래를 말한다. (文學博士 趙容晧 譯)

 

아리랑이 발생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조선 말기에 궁궐에서 한창 유행하다가 이윽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널리 불리어졌다. 노래는 <후정화>에 비유될 정도로 애조를 띤 곡조이다.

 

전국적 분포⋅근대에 유행⋅애조⋅민족 노래

김소운은 최남선이 경상·전라·강원·서도 등지의 아리랑을 제시하고 분류한 이래,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방의 것, 서부 조선을 주로 한 것, 강원도 부근의 강원 아리랑, 부산 등지에서 듣는 남부 조선의 것, 전라도의 특이한 아리랑 등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아리랑에 대한 율조(律調)를 논하면서 <江原 아리랑> <京畿 아리랑> <西道 아리랑> <嶺南 아리랑> 등을 악보와 함께 소개하였다. 이때 비로소 지역명을 사용한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상과 같이 중요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리랑에는 다양한 형태의 본질적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더 세밀하게 살펴 나가면 숨겨져 있는 많은 내용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4.2 아리랑의 특성 분석

지금까지의 아리랑 연구는 뜻 모르는 대상으로서의 후렴구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 왔다. 그렇지만 다양한 기록을 검토해 보면 결코 뜻 모르는 노래가 아니다.

첫째, ‘아리랑’의 뜻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거나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아리랑’이라는 정확한 표현과 더불어 노랫말의 특성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기록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매천야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편년체 역사서. 아리랑의 뜻은 여성[阿里娘]이며, 신성염곡(新聲艶曲)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한 매천 황현(黃玹)의 저서(1894년 기록분)

 

1894년의 기술을 통해, 아리랑(阿里娘)의 뜻은 여성(女性)을 뜻하는 랑(娘)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의 뜻은 여성 또는 여성을 포함하는 다른 의미로서의 아리랑(阿里娘)인 것이다.

또 다른 기록으로 미국인 헐버트는 「조선의 성악」, 조선 노래 모음집(The Korea Repository)(1896, 49~50쪽)에서 ‘나는 남편을 사랑해요(I love my husband)’라는 뜻의 한자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의 성악에서 아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식중 주식인 밥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후렴구는 뱃놀이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많다고 보았는데, 아리랑은 물과 관련된 노래라는 이야기가 된다.

둘째, 매천야록에 기록된 타령(打令), 신성염곡(新聲艶曲) 등의 표현을 통해 노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에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는 여성의 이름인 아란[阿蘭曲]이라는 형태로도 기록하였는데, 이는 최영년이 거론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중류층 이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슬픈 음조의 노래라는 측면에서 헐버트의 기록과 동일하다. 아리랑은 깊은 감동을 주는 노래로, 이미 조선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다.

나아가 1912년의 자료에서도 아랑(阿郞), 애아랑가(愛我娘歌)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록에서의 아리랑은 젊은 여자를 뜻하며, 랑(郞)이라는 글자와도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에 나타난 자료들도 비슷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1921년, 와다 텐민[和田天民,, 조선의 향기(朝鮮の匂ひ), 京城:ウツボヤ書籍店, 1921]은 아리랑의 후정화적 성격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 발생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조선 말기에 궁궐에서 한창 유행하다가 이윽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널리 불리어졌다. 노래는 <후정화>에 비유될 정도로 애조를 띤 곡조이다.

셋째, 우령(優伶), 궁중의 곡연음희(曲宴淫戱)등의 표현을 통해 가극으로도 상연되었음을 알 수 있고, <아리랑>은 그러한 가극 속에서 불린 노래이다.

넷째, <정선 아리랑>에서는 충신불사이군의 노래로 이해하고 있다. 아리랑 노랫말에 그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른 형태로 숨겨져 있다는 뜻이 된다. 하나의 노랫말 속에 여러 개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섯째, 님 웨일즈(Nym Wales)가 김산(본명 장지락)과의 인터뷰를 통해 쓴 아리랑(Song of Ariran)(1941년)에 의하면, <아리랑>이 만들어진 시기는 “몇 백 년 전인 조선시대(Li Dynasty)”이며, ‘아리랑 고개’라는 구절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비밀결사의 노래(secret revolutionary version)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참요 성격을 띤 ‘비밀결사’의 노래로 외면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섯째, 아리랑(Song of Ariran)(1941년)에 의하면, 아리랑 고개라는 구절의 노래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아리랑 고개라는 구절이 없는 노래가 원초적 모습에 가깝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구아리랑>에서 <아리랑>으로 재편되었다는 구조상의 개념과도 같다. <구아리랑>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아리랑>으로 변형되었는지 구조적⋅의미적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 고정옥은 아리랑 노랫말 속에 실제의 이야기들이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아리랑이 근대 생활의 만화경”이라고 한다. 이는 <정선 아리랑>이나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등에 다양한 형태의 설화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리랑이 갖고 있는 문학 장르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 1912년에 채집된 자료를 통해 아리랑이 전국에 걸쳐 산재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최남선, 김소운 등도 특정한 지역별 아리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민요들과 달리 조선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그러면서 아리랑 고개가 있는 노래와 없는 노래로 구분된다. 이는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변화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비밀결사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그에 상관없이 계속적으로 불리고 있다. 아리랑에 나타나는 후렴구를 일반화 된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홉 번째, ‘아리랑’은 두 개의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유사한 표현이 아이롱(我耳聾)이라든가, 아이롱(啞而聾)⋅아아이롱(我啞而聾)⋅아리롱(啞利聾) 등과 같은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아리랑’의 뜻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노래의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뜻을 표현할 수 있다. 본래적인 뜻과 상징적인 뜻이 있는 중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열 번째, 아리랑이 특정한 시기의 문학 장르적 성격을 갖는다면 그러한 성격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특성들을 또한 만족시킬 수 있다. 한 예로 국문학사를 통하여 가극에서 신성염곡의 노래가 불리는 문학 장르가 있었는데, 노래와 춤을 이용하여 실제로 있었던 고사(故事)를 연출하고,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극의 특성으로 인하여 지방 사투리와 같은 속어를 많이 사용한다.

신성염곡이라는 의미 속에는 남녀 간의 짙은 사랑의 이야기가 등장하여 음가염곡(淫歌艶曲)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사인 변풍으로 표현한 것과 같으며, 문학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다.

열한 번째, <아리랑>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는 사랑하는 남자가 어느 날 아리랑 고개를 넘어 떠나가 버리자 버림받은 여인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십 리를 가기 전에 발병이 나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하는 내용이다. 남자가 떠나 버리자 남아있는 여자가 부르는 한(恨)의 노래이다.

황현의 기록에서도 랑(娘)이라는 뜻이 되어야 한의 노래가 되는 개념과도 일치한다. <아리랑>은 조선의 산천과 더불어 살아온 조선인의 심성을 닮은 노래이고, 조선의 산천에 동화되어 한을 표현하는 노래인 것이다. 아리랑이 한의 노래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열두 번째, 채록된 가사들을 분석해 보면, 아리랑 노래의 가장 본질적인 소재는 물[水]이나 배[船]에 특정한 관련이 있다. <구아리랑>에 만경창파 등과 같은 물[水]과 관련된 노랫말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헐버트가 기록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역사적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노랫말의 내용을 통해 아리랑의 뜻과 성격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의 사실은 <아리랑> 해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고건축 장자문의 비례 등과 같은 분야에서도 지속적인 연구와 실측을 통해 점차적으로 그 신비한 이야기가 규명되고 있기도 하다.

아리랑은 뜻을 모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아리랑 연구는 기록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매천야록의 경우 ‘아리랑’의 뜻에 대한 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1930년대를 훨씬 지난 시점인 1955년에 와서야 출판된 이유로 수많은 어원설 중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리랑’의 뜻이 랑(娘)이 되면 떠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어 노랫말의 내용과 반대가 되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해야할 사실은 역사적 기록(記錄)이라는 측면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했던 것이었으나,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기록과 설을 혼동한 잘못된 연구의 소산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아리랑>의 원형에는 기록에 나타나는 모든 성격들이 포함되어 있게 된다.

 

후렴구 분석

아리랑에 대한 연구는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에 한정된 의미 파악을 중심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으나, 후렴구와 사설 간의 정합성은 물론 다양한 각편과의 관련성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리랑’의 뜻이나 발생시기(發生時期), 지역별 아리랑과의 상관관계, 음악적 구조 등은 각기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된 뿌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리랑’, ‘아리랑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비롯하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밀양 아리랑>),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진도 아리랑>), ‘아리랑 대리랑’(<아리랑>), ‘아리랑 쓰리랑’(<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구료’(<구아리랑> 또는 <긴아리랑>)라든가 ‘시리랑 고개’(<평창 아리랑>) 등 다양한 형태의 후렴구도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며, 이들 간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노랫말에 나타나는 후렴구는 일정한 구성적 패턴이 있다. 아리랑 쓰리랑이라는 형태가 단순한 후렴구가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阿郞歌 531>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이요

<밀양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났네

<密陽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낫네

<아리랑타령>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리랑이 났네의

<진도 아리랑>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타령4> 아리 아리랑 시리 시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아리랑 대리랑

 

후렴구는 다섯 가지 형태로 분류되며, 쓰, 스, 시, 대 를 중심으로 문장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아리랑(阿里娘)을 한문구조로 변형하면, 시(是)라는 서술형 동사를 중심으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다. 형태상의 차이는 시(是)라는 동사가 아리랑 후렴구에서는 쓰, 스, 대 라는 형태로도 나타나고, 아랑, 여랑, 리랑에 나타나는 발음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두 종류 간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시(是)라는 동사를 고려하면, 후렴구에 동일한 ‘시’가 있고, 그 외에는 쓰, 스, 대 가 있다. 이는 모두 동일한 뜻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아리랑 후렴구에 나오는 동사는 쓰(是), 스(是), 시(是), 대(對)가 되어 ‘~이다’ 또는 ‘그렇다!’는 뜻을 갖게 된다.

문장 형태는 동사를 중심으로 당시의 중국음과 우리음을 조합한 한문 구어체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음운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시(是)는 구어체 문장 속에서 대(對)와 같은 뜻이다. 쓰와 스를 중국음운으로 발음할 경우, 쓰(是)는 스(是)의 원래 발음에 해당하는 강세형이다. 음운 변화가 일어난 동일한 시대에 나타난 변형된 발음이다. 이는 中原音韻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去聲

是氏市柿侍士仕使示諡時恃事施嗜試弑筮視噬

是를 비롯한 氏市柿侍士 등이 모두 '스'로 발음되었다. 그러나 中原音韻이후에 나타난 중국 음운상의 변화는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쳐 발음상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즉 스(是)가 시(是)라는 발음형태로도 바뀌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적으로 14세기 중반이후에 해당하는 중국 원대(元代), 즉 우리나라의 고려후기에 해당하며, 이는 원의 대도(大都)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통일의 영향으로 북방민족의 언어가 전통적인 중국어와 섞이면서 일어난 얼화운(兒化韻) 현상에서 기인한다.

그 전에는 ‘스’라는 발음으로 정확히 들리었지만, “中原音韻이후 독특한 성질을 지닌 얼화운의 발생”에 따른 영향으로 ‘시얼’, 즉 ‘시ㄹ’라는 형태로 권설음화 되면서 ‘시’라는 발음으로도 들리기 시작한 것이고, ‘스’와 ‘시’가 혼용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중세음운에도 영향을 주게 되어, 서서히 시(是)라는 발음으로 정착되게 된다.

음운의 발전과정에서 확인해 보면, 구간(舊刊)노걸대 언해(老乞大 諺解)에서는 중국음 스(是)가 ‘시’보다 우세하게 들리었으며, 등장인물로 고려인(高麗人)이란 명칭이 나온다.

그러나 중간 노걸대언해(重刊 老乞大諺解)에서는 시(是)로 정착되었으며, 조선인(朝鮮人)으로 나온다. 조선으로 바뀐 이후의 노걸대(老乞大)를 언해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중국에서 발생한 발음의 변화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시점 이후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구간(舊刊) 노걸대가 언해될 시점까지는 ‘스’와 ‘시’라는 음으로 혼용되기는 하였으나 ‘스’가 우세하였고, 중간 노걸대언해이후에는 ‘시’라는 음으로 정착된 것이다.

 

아리랑의 뜻

아리랑 후렴구에 존재하는 규칙은 둘째 음절의 리을(ㄹ) 음소를 니은(ㄴ) 음소로 바꾼 후, 세 음절인 경우 ‘니’를 ‘뉘’로 바꿔주는 것인데, 이를 <밀양 아리랑>에 나오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과 <진도 아리랑>에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에 대입하면 아리랑 후렴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中原音韻, 노걸대, 구간(舊刊)노걸대 언해, 중간 노걸대언해, 노걸대 박통사언해, 역주 석보상절등을 참조하면 당대에 사용된 발음이나 언해된 용례가 있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을 한문으로 읽으면 '아니 아여랑 시니 시여랑(啊你 啊女郞 是你 是女郞)' 형태가 된다.

 

[강 세 형]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밀양 아리랑>

[암 호 문]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진도 아리랑>

[음절조작] 아니 아니랑 스니 시니랑

[스 =>시] 아니 아니랑 시니 시니랑
아니 아니랑께 신(臣)이 신(臣)이랑께

[한어발음] 아니 아뉘랑 스니 스뉘랑

[한 문] 啊你 啊女郞 是你 是女郞

[중 세 어] 아 네! 아 女郞! 올니, 이 네, 이 女郞!

[현 대 어] 그대! 아리랑! 그래, 그대! 아가씨! 이다.

[원래의 뜻] 푸른 푸른 물결 시린 시린 물결 무사히 건넜네

 

뜻 없는 후렴구로 알려져 있던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은 ‘아리랑은 여랑(女郞)’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리랑이 신성(神聖)한 아가씨(女郞)임을 정의하는 암호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랑이라는 표현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의 어머니이며, 신성한 물의 여신인 여랑(女郞)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구아리랑>에 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실제 있었던 고사를 이야기하는 장르의 특성상, 노래 속의 주인공을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의 어머니 이야기로 묘사한 것이다. 아리랑은 오래된 한민족의 노래이므로, 고구려 건국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고구려는 부여에서 왔으며, 부여는 고조선에서 온 나라이고,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라는 역사적 사실을 <아리랑> 노랫말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연원 고찰

기록에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연원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은 특정한 의미를 상징한다거나, 조선 초기에 나온 정치적 방임주의라든가, ‘아리랑’의 뜻은 ‘아리랑[阿里娘]’이며 신성염곡(新聲艶曲), 곡연음희(曲宴淫戱), 애조를 띠면서, 충신불사이군이고, 남녀상열지사의 변풍(變風), 비밀결사(秘密結社), 생활의 만화경(萬畵鏡),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한(恨)의 노래, 물과 관련된 노래 등을 포괄하는 다중의시로 재구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추정되는 연원에 대해서는 기록, 노래 구성의 형태, 중세한어와 국어의 어휘적 측면 등에서 고려할 수 있다.

첫째, 채록된 가사에 나타나는 소재(所載)의 상황을 통해 노랫말의 연원을 추정할 수 있다.『俚謠․俚諺及 通俗的 讀物等 調査』(조선총독부, 1912)에는 아리랑에 대한 가사 뿐만 아니라 이요(俚謠)라는 형태로 전래되던 한시의 형태도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는 목은 이색(李穡)이 여말선초에 지었다는 한시가 당시의 형태와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채록되어 전하고 있다. 즉 다음의 한시는 이색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窓外三更細雨時

兩人心事兩人知

新情未洽天將曙

更把羅衫問後期

 

그런데 이 작품을 바탕으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형태가 1912년 자료에도 민요라는 형태로 두 편이 채집되어 있다.

 

窓外三更 細雨時에

兩人心事 兩人知라

新情이 未洽하여

하늘이 장차 밝아온다

다시금 四衫을 베여잡고

後期約을 물으리라 (채집 : 慶北)

(『한국민요집 』Ⅳ-552)

 

窓外三更 細雨時에

兩人心事 兩人知라

新情이 如流하여

更把莫衫 問後期라니

아마도 不忍惜別은 네나 내나 (채집 : 義州)

(『한국민요집 』Ⅳ-951)

 

작성된 시기와 관련하여 가장 큰 문법적 특색 중의 하나는 13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파자문(把字文)이 사용된 문장 형태[更把羅衫問後期]라는 점이다. 또한 이색이 한시를 지었다는 여말선초와 1912년과는 500여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자에 토를 단 것과 일부를 번역한 정도 외에는 형태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개의 추론이 가능하다. 우선, 1912년에 채록된 자료는 500여년의 세월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불려왔을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처음 만들어진 노래는 원형이 크게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측면이다. 그러한 점에서 <아리랑>이 지속적으로 불려온 노래라면 현재의 형태와 원형 간에는 변화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만들어진 시기는 여말선초로 소급된다.

둘째, 기록적 측면이다. 황현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신성염곡(新聲艶曲)은 고려 후기에 해당하는 13세기 이후에 나타난 형태로, 원과의 교섭을 통해 국문학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 장르적 특성이 있다. 또한 님 웨일즈의『아리랑(Song of Ariran)』(1941년)에서는 몇 백 년 전 조선시대를 발생 시기로 제기하고 있다.

조선에는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을 담고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아리랑은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조선민요이며, 300년 동안이나 애창되어 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1926년)에서 처음 만들어진 노래로도 알려져 왔으나, 김산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불리어 왔음을 증언하고 있다. 나아가 <아리랑>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내용도 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압정 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진 가지에 목이 메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 있었다. 그 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다. 이조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정치적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은 특정한 한 개인인 젊은이가 옥중에서 만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산의 주장을 기술한 역사적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아리랑의 발생 시기는 여말선초에 해당하는 조선 초기까지 소급할 수 있고,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고권삼은 <아리랑>이 조선 초기의 정치적 방임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승훈의 「農夫詞」에 나오는 ‘아로롱(啞魯聾)’은 고권삼이 제기한 ‘아이롱(我耳聾)’과 유사한 발음이므로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여말선초의 특정한 일에서 ‘아리랑’을 빗대어 상징하면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간에는 특정한 대응관계가 존재할 수 있고,『매천야록(梅泉野錄)』이 갖는 기록적 상황 하에서 상관관계를 해석할 수 있다면 여말선초에 발생한 상징적인 사건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고정옥은 “최초는 한 개의 멜로디에서 출발”이라든가 “호란․왜란 때 채집한 가사” 등의 언급을 통해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는 슬픈 음조를 띤 노래라는 형태로도 표현하고 있는데, 신성염곡이라는 측면에서 망국의 시점인 여말선초의 시기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아리랑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다가 조선 초기에 특정한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아리랑의 발생 시기는 여말선초이다.

셋째, 경기체가에서 유사한 형태가 나타난다. 안축(安軸)의 <관동별곡>을 포함한 경기체가(景幾體歌) 형태의 노래에서는 <아리랑>과 유사한 형식이 나온다.

 

海千重 山萬疊 關東別境

碧油幢 紅蓮幕 兵馬營主

玉帶傾盖 黑槊紅旗 鳴沙路

위 巡察ㅅ景 긔 엇더니잇고.

朔方民物 慕義起風

위 王化中興ㅅ景 긔 엇더니잇고

 

<관동별곡>의 1구와 2구는 334조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형태의 노랫말이 경기체가를 중심으로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아리랑>은 한문으로 지어진 노래와는 달리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해서 지은 또 다른 형태의 변형을 보인다. 발생 시기는 고려 후기가 된다.

넷째, 비교문학적으로 고려후기에 해당하는 중국의 원대(元代)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산곡(散曲)을 비롯하여, 명대(明代) 초기에 만들어진 <벽파옥(劈破玉)> 등과 같은 작품에는 문장 구성적 측면에서 경기체가나 <아리랑>과 유사한 형태의 모습이 있다.

 

劈破玉

蜂針兒 尖尖的 做不得綉

꿀벌침이 제아무리 뾰죽하다 한들 수를 놓을 수 없고

螢火兒 亮亮的 点不得油

반디불이 제아무리 밝다고 한들 기름에 불을 달수 없다네.

蛛絲兒 密密的 上不得簆

거미줄이 얼기설기 엉키여도 바디에 걸 수 없고

白頭翁 擧不得 鄕約長

알락할미새 백발을 떠이여도 향약장이 될 수 없고

紡織娘 叫不得 女工頭

베짱이 잘 내여도 베 짜는 여인들의 우두머리 될 수 없네.

有怎麽 絲線兒 相牽也

우리에게 무슨 인연이 아직도 남아 있어

把虛名挂在傍人口!

빈이름 만 걸어 놓고 말밥에 오르리오!

(「熊捻寰」『精選劈破玉歌』

 

<벽파옥(劈破玉)>은 형태상 334조이고, 노랫말 속에서 사용된 특수한 한어 음운적 형태인 ‘얼[兒]’이 사용된 문장[蜂針兒, 蛛絲兒, 絲線兒]이고, 특정한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한어 문법적 특징인 ‘바[把]’를 사용한 문장[把虛名挂在傍人口!] 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세한어로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한어에서 13세기 이후부터 나타난 특징이며, 그러한 측면에서 명대 초기에 지어진 작품이므로 여말선초에 해당한다.

다섯째, 언어적 측면이다. ‘날 바리고’라는 형태는 우리 시가 사상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형태이다. 향가인 <安民歌>에도 이러한 형태를 표현한 문장이 있다. 또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釋譜詳節』(1447년) 등에도 유사한 형태가 나온다. 이러한 형태는 한어 구어체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 내부적인 규칙을 정하게 되면 ‘가시는 님은’도 한어 구어체로 표현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사용된 문장 형태이다.

여섯째, ‘날 바리고’ 등의 표현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는 ‘넘어간다’, ‘발병난다’ 등의 용법은 중세국어 언해에 사용된 한문과도 관련이 있다.

 

大哥你從那裏來 큰형아 네 어드러로셔조차 온다 (『老乞大諺解』, 1a)

我從高麗王京來 내 高麗 王京으로셔 조차 오롸 (『老乞大諺解』, 1a)

如今那裏去 이제 어드러 가다 (『老乞大諺解』, 1a)

 

대화체 한어의 형태와 관련하여『舊本老乞大』(또는『元代漢語本 老乞大』)는 여말선초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중세국어로 언해된 내용을 노랫말에서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일곱째,『梅泉野錄』에 나오는 ‘阿里娘’이라는 표기는 고어적 특성이 있다. ‘아(阿)’의 용법은 문장 형태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국문학의 경우 18세기 후반에 이르러『老乞大新釋』(1761년)이 만들어진 시점을 전후로 ‘아(啊)’라는 형태로 자형이 변화되어 나타난다.

고어적 측면에서 ‘랑(娘)’은 고대에 여신, 황후나 고귀한 신분의 여성, 어머니 또는 젊은 여자 등 몇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여자를 뜻하는 경우에는 ‘애아랑(愛我娘)’이나, 나이가 든 여자인 ‘노랑(老娘)’ 또는 ‘대랑(大娘)’이 있다.

고귀한 신분의 젊은 아가씨를 뜻하는 경우에는 ‘아랑(阿娘)’이라든가, 글자는 약간 다른 형태이지만 같은 의미로 쓰이는 여랑(女郞)이 있다. ‘여랑(女郞)’이라는 표현은「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타나는 하백여랑(河伯女郞)에서 처음 사용된 호칭으로 고구려 건국의 시조인 주몽의 어머니이며, 우발수를 지키는 ‘신성’한 물의 여신 ‘아가씨’를 뜻한다.

따라서 ‘아리랑’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여자를 뜻할 경우에 사용하는 로(老)나 대(大)와 같은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이므로 고귀한 신분의 ‘아가씨’를 뜻한다. 그러나 ‘아리(阿里)’의 뜻을 모르므로 어떠한 아가씨를 뜻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특정한 호칭이 아니고, 기존에 있던 의미를 ‘아가씨’라는 뜻으로 변경하여 두 개의 뜻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리 랑(阿里 娘) (뜻 : 아리랑은 여성[娘]이다)

아리랑 시 랑(阿里랑 是 娘)

아리랑 시여랑(阿里랑 是女郞)

 

원래에 있던 ‘阿里랑’의 뜻을 ‘랑(娘)’으로 바꾸면서 새롭게 정의하는 문장으로서 ‘아리랑 시랑(阿里랑 是娘)’이 되었고, 세음절로 줄여 ‘아리랑(阿里娘)’이 되었다. 하나의 문장 속에 2개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를 뜻하는 ‘랑(娘)’이 나오면서 신성염곡의 노래가 되는 형태는 13세기 이후에 성행한 예술 장르와 일정한 관련성이 있다.

 

Ⅴ. 결론 및 향후과제

아리랑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고난을 물리치고 이겨내는 한민족의 불굴의 기상이 담긴 노래이다. 역사의 힘든 과정 속에서도 우리 민족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노래였으며, 그러한 이유로 민족의 노래로 정위(定位)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의 뜻은 물론이고 노래가 의미하는 바도 모르는 상황이 지속되어져 왔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더 하다. 1918년에 기록되었지만 근래에야 출판된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에는 아리랑이 특정한 시문법에 의해 운용되고 있는 암호문적 성격이 있고, 뱃노래를 연상시키고 있다고 전한다.

또한 『매천야록』(1894년)에는 아리랑의 뜻은 여자이며, 동시에 신성염곡의 특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님 웨일즈(Nym Wales)는 아리랑(Song of Ariran)(1941년)에서 아리랑이 만들어진 시기는 “몇 백 년 전인 조선시대(Li Dynasty)”이며, “아리랑 고개라는 구절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비밀결사의 노래(secret revolutionary version)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아리랑은 뜻 모르는 후렴구의 노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조선총독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아리랑 발생설’은 아리랑을 뜻 모르는 노래로 희화화하는 근원이 되었고,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식민사관을 감추고 있었다.

아이롱(我耳聾)설·아리랑(我離娘)설·아난리(我難離)설·아랑(阿娘)설은 조선 망국의 책임을 위정자들의 압제에 돌림으로써,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전개하려는 논리를 숨기고 있다.

아랑위(兒郞偉)설은 자체적으로 만든 사상이 없는 무창견의 민족이므로 일제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알영(閼英)설은 신라시조 박혁거세는 일본 왕족이고 신라는 고대로부터 식민지였기 때문에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 구조이다. ‘아리랑 발생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 구조로 만들어진 식민사관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강제로 국권을 빼앗겼던 1910년으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식민사관의 틀에 갇힌 채 뜻 모르는 노래로 희화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아리랑을 제대로 알아야 할 때이다.

2002년에 이르러 아리랑의 기록을 세밀하게 검토하게 되었고, 본질적인 모습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리랑의 뜻은 신성한 아가씨이며, 애조를 띤 신성염곡의 노래이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며 조선 초기에 나온 정치적 방임주의, 가극 형태로 연행되고, 충신불사이군이면서 남녀상열지사, 비밀결사, 생활의 만화경(萬畵鏡),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한(恨)을 나타내고, 물을 건너는 원초적 모습 등 다양한 특성들을 가진 고전시가인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행가는 아니었다. 아리랑은 여말선초의 다중의시 암호문이었다. 아리랑을 다중의시 형태로 만든 이유는 진정한 의도를 내면에 숨기고 밖으로는 다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영화 아리랑(1926년)을 비롯하여 다양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지만, 노래의 본질이나 원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구의 콘텐츠일 뿐이었다. 다중의시로서의 아리랑 원형에 나타나는 본질적인 모습을 통해 민족문화콘텐츠로서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훌륭한 작품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미래의 과제는 아리랑에 담겨있는 실제의 이야기를 제대로 널리 알림으로써 자긍심과 희망으로 가득한 새로운 한민족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리랑>은 태고에 푸른 물결을 건너는 노래인 <구아리랑> 형태의 <아리도하가(阿利渡河歌)>에서 출발하여 전국에 걸쳐 산재하게 되었는데, 여말선초에 이르러 후렴구를 사용한 가극 형태에서 불리는 비밀결사의 노래로 바뀌게 되었다.

내면에 (1)충신불사이군의 내용을 가지면서, 외부적으로는 그러한 뜻을 알지 못하도록 (2)남녀상열지사의 고사(故事)를 반영하고, (3)실제로 있었던 비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문장이 동시에 세 개의 뜻을 갖게 된다.

또한 고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극에서 불리는 노래는 (4)동일한 발음의 단어가 다른 뜻을 가질 수 있는 장르적 특성과 (5)사투리를 사용하여 또 다른 의미를 표현하는 상황적 특성을 활용하기 때문에 2개의 뜻이 추가되어 5개의 뜻이 된다.

나아가, 비밀결사의 노래는 그 내용이 외부에서 알 수 있으면 안 되므로 암호문이 해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십리도’와 같은 형태로 일부 단어에 변형을 줌으로써 다른 뜻의 노래로 바뀌게 되는데, 이를 통해 (6)고려시대의 한 맺힌 공녀(貢女) 이야기, (7)종교적 설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7개의 뜻을 가지며, (8)아리 이랑 ‘곡애(谷涯)’와 ‘고개’가 가지는 발음상의 특성과 <구아리랑>이 초기에 2행으로 된 노래라는 측면을 이용하면 (8) 비밀결사에 참여하였으나 도중에 탈퇴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인류애(人類愛)를 표현하는 내용과 (9)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던 충신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10) 암호문을 만든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문장이 동시에 10개의 뜻을 갖는 십중의시(十重義詩)가 된다.

이를 통해 아리랑의 성격 분석에 나타난 모든 특성들을 만족함은 물론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고대에서 여말선초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까지 노랫말 속에서 찾을 수 있게 되어 <아리랑> 노래 속에 잠재되어 있던 조상의 위대한 사상(思想)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리랑은 여말선초에 고려에 대한 충신불사이군의 정신과 기개로 반역성혁명을 주진하던 반역(反逆)의 노래였으나 조선은 고려를 위해 충절을 다하다 죽어간 정몽주나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사육신을 충신으로 인정해 준 것처럼 아리랑을 조선의 노래로 인정함으로써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아리랑의 원형에 대한 재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영화의 가사로 처음 만들어진 유행가는 아니었다. 여말선초에 재구된 아리랑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들의 삶과 죽음 이야기이다.

아리랑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참요로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과 같은 상태로 변형된 위대한 서사시이다. 원시시대부터 이어진 5천년의 유구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의 아리랑은 선행연구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기록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더욱 깊이 있고 내실 있는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 노래인 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노랫말 텍스트에 담겨있는 상황을 제대로 된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의 발굴과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학문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제5부 끝)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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