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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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40)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10.1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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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연구 -1(제19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열 아홉번째 주제는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연구'이다.(편집자주)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연구

Analysis on the meaning and origin of Arirang

조용호(趙容晧)

 

 

Ⅰ. 서 론

아리랑의 어원 및 발생 시기와 관련하여, 유사한 형태는 18세기 말부터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에 나오는 「농부사(農夫詞)」는 1790년에 지은 것이므로, 그 이전에도 노래가 불렸을 가능성은 있다. 『만천유고』에 나오는 다른 문집들도 기존에 있던 내용을 새롭게 개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조선시대이다.

황현은 1894년에 기록한 『梅泉野錄』에서 아리랑을 신성염곡(新聲艶曲)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측면에서 그 기원은 비교적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가사채집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민요나 속담 등을 통해 조선심(朝鮮心)을 파악하려는 측면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며, 다수의 아리랑이 채집되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제공하는 자료로 변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랑’의 뜻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광수는 「民謠小考(1)」(1924)에서 고대에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지만, 그 뜻은 소실된 것으로 판정함으로써, ‘아리랑’이나 ‘아라리요’ 등과 같은 뜻 모르는 후렴구의 의미를 밝히려는 연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남선은 이광수와는 달리 경복궁 수축(景福宮 修築) 시기에 시작되어 광범위하게 넓혀졌다는 관점에서 근대요(近代謠)라는 개념을 갖고 있고, 김소운은 최남선의 견해와 유사하며 아리랑의 율조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가사에 보이는 근대적인 데카당스와 망국적(亡國的)이라고 불리는 애조(哀調)등으로 인하여 일본에 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마다 특색을 가진 율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동일종의 민요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때 까지만 해도 아리랑은 조선에 널리 산재되어 있는 대표적인 민요라는 개념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통해 아리랑의 발생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아리랑’의 뜻은 확정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진행된 주요 논점들을 중심으로 아리랑 어원 연구의 진행과정을 고찰함으로써, 향후의 아리랑 연구가 지향해야할 방향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주제어 : 아리랑 어원, 아리랑 발생, 매천야록, 연구방향

 

Ⅱ. 발생시기에 대한 논점

아리랑의 어원과 관련하여 조선총독부의 아리랑 발생설이 제기된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주장과는 많이 다르며, 아리랑에 대한 기록도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아리랑 발생설과 시차가 거의 없는 시기에 고권삼은 아리랑이 조선 초기의 독재적인 무인정권(武人政權) 치하에서 발생하여 불리기 시작한 것이며, 정치적 방임주의 인생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말선초라는 발생 시기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승훈의 「농부사(農夫詞)」 나 황현의 기록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님 웨일즈는 아리랑이 조선 중기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김산의 증언이라는 형태로 기록하였고, 고정옥은 근대생활의 모습들이 노래에 반영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근대요(近代謠)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근대요라는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고정옥의 논점은 아리랑이라는 노래 자체는 오랜 옛날부터 형성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병도는 낙랑(樂浪)의 고어 발음은 ‘악랑’이며, 이는 고대 지명에 나타나는 ‘알라’ 또는 ‘아라’의 사음(寫音)으로 ‘아리랑’을 뜻하므로 아리랑은 고대에 만들어졌다는 논지이다. 양주동은 유사한 지명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예로 들면서 오랜 옛날에 만들어졌음을 논하였다.

이러한 고대설과 달리 조동일은 민요나 아리랑에 나타나는 다양한 특성과 미의식, 항일 비판 정신이나 저항성 등을 중심으로 하여, 고정옥이 언급한 근대생활의 만화경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요로 설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김시업은 아리랑을 근대민요라는 측면에서 분석하였으며, 저항성을 강조하였다. 근대의 노래일 가능성을 제기한 기저에는 아리랑에 대한 기록이 19세기 말 이전에 보이지 않으며, 근대생활의 다양한 모습이 노랫말에 나타나는 점도 작용하였다.

고정옥의 논저와 더불어 이 두 편의 논문은 아리랑을 근대민요로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고민할 점도 있어 보인다.

조동일과 김시업은 몇 가지 문제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고정옥이 제기한 아리랑의 성격과 기원에 대한 문제이다.

근대생활의 모습들이 노랫말에 많이 나타난다는 논지는 수용하였지만, 노래 자체가 오랜 옛날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고정옥의 주장을 선별적으로만 수용하여 아리랑은 근대요라는 개념으로 오인한 측면이다.

또한 아리랑이 근대요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농부사」의 작성 시기와 황현의 기록에 나타나는 1894년의 발생 시기는 채용하였으나 아리랑을 아로롱(啞魯聾)으로 표현한 이유와 아리랑이 랑(娘)이라는 뜻은 수용하지 않았고, 님 웨일즈가 조선시대에 감옥에서 한 반역자인 젊은이가 아리랑을 만들었다는 조선 중기 이전 기원설을 수용하지 않았다.

기록을 선택적으로 활용하여 아리랑의 발생 시기를 근대로 변형하는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근대설 또한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조동일과 김시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보형은 음악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아리랑이 근대요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구아리랑이 아리랑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근대에 발생한 것이라는 관점도 제기했다. 조용호는 아리랑에 대한 원형 복원의 과정을 통해 발생 시기를 여말선초(麗末鮮初)로 보았다.

이와는 달리 근대설(近代說)은 아리랑이 기록에 나타나는 근대를 발생시기로 보고 있으며,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에서 만들어진 노래라는 주장과도 일정부분 관련이 있다.

근대설은 기록에 의한 연구라는 점에서 실증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나, 기록에 나와 있는 내용을 제한적이며 선별적으로 활용하는 문제점도 노출하고 있다.

한 예로, 황현의 기록 중에서 1894년에 아리랑이 불렸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신성염곡이라는 성격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이 없었으며, 아리랑의 뜻이 여자인 랑(娘)이라는 기록은 무시하고 있다.

아리랑의 발생 시기에 대한 전문적인 고찰로는 임동권과 조규익의 담론이 대표적이다. 임동권은 고대설과 근대설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였다.

고대설(古代說)은 아리랑이 민요이므로 오래 전부터 불리었을 것이라는 추론적 측면이 있다. 고대설은 다시 조선 시대에 발생한 것이라는 세부적인 주장도 있는데, 이는 조선초기의 왕조 교체기와 관련된 내용도 있다.

고대설의 문제점은 상응하는 당시의 직접적인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규익은 가장 최근까지[2010년 9월] 논의된 아리랑 관련 담론들을 집대성한 형태의 논문을 통해 “『훈몽자회(訓蒙字會)』와 같은 문헌을 바탕으로 형태소 배합형의 조어법이 이미 조선 성종 조 전후에서 일반화된 것으로 본다면, 그 조어법의 출발점이야말로 여말선초까지도 올라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아리랑의 발생 시기가 여말선초라는 논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아리랑의 발생 시기는 세분할 경우 고대설, 조선시대설, 근대설로 분류할 수 있다. 아리랑의 발생 시기에 대해 종합해 보면, 이승훈의 기록은 18세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에도 노래가 불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현의 기록은 신성염곡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역사상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는 고권삼, 조용호가 제기한 조선 초기 또는 여말선초라는 측면에서 시기가 일치하며, 님 웨일즈와도 거의 일치한다. 조선 초기 또는 여말선초에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이광수, 이병도, 양주동은 조선시대 이전에 해당하는 고대를 발생시기로 보고 있으며, 고정옥은 고대에 발생했으나 근대 생활의 모습이 노랫말에 나타났다는 측면에서 고대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고대설은 아리랑이 고대에 발생했으나 여말선초에 재편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근대라는 측면에서 최남선, 김소운은 경복궁 수축시기로 보고 있고, 조동일, 김시업, 이보형은 근대에 형성된 노래라는 측면에서 근대민요로 보고 있고, 영화 아리랑 노래와의 일정한 관련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리랑의 발생 시기를 근대로 보는 주장은 최남선이 갖고 있던 근대요라는 개념이 김소운을 거쳐 고정옥에 이르러 근대생활의 만화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다시 조동일의 항일 비판이라는 시각을 통해 김시업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근대민요 아리랑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려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현이 기록한 ‘아리랑(阿里娘)’의 개념과 가극에서 불린 노래라는 기록을 고증하지 않았다. 근대라는 주장은 특정한 기록에 기초한 실증을 강조한 측면의 주장이다.

그러나 기록을 선별적으로 활용하는 상황은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민요가 기록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실질적 측면과 얼마 되지 않는 기록에 의해서 시기를 확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며, 아리랑에 나타나는 다양한 성격과의 비교를 통해 기록 이전의 발생 시기나 『이요 ․ 이언 및 통속적 독물 등 조사(俚謠․俚諺及通俗的讀物等調査)』에 채록된 민요의 연원에 대해서도 고찰하는 것이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은 한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민족의 노래를 대표하며, 그 연원은 민족의 뿌리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Ⅲ. 후렴구 연구의 방향

아리랑의 뜻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었고, 해방 이후에도 어원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연구의 영향으로 의미 없는 후렴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며, 보다 확실한 연구가 가능한 분야로의 전환도 모색되었다.

일부의 기록에 나타나는 시점을 중심으로 한 근대요(近代謠)로서의 성격 파악이나 발생 시기 고찰이라든가, 하위범주에 해당하는 지역별 가사 연구 또는 음악적 구조 분석 등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시대적 특성에 맞는 문화콘텐츠 방안이나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아리랑學 정립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의 뜻을 아는 것은 연구의 핵심이기 때문에 어원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기록을 심층적으로 고찰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는 기록과 설이라는 형태로 존재해 왔는데,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고, 설은 개인적인 주장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학술논문․단행본․평론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어 왔으나, 공통점은 기록과 설을 혼동하고 있다는데 있다.

아리랑 연구는 기록을 무시한 채 진행되어 왔으며, 연구자의 기호에 따라 기록을 선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왜곡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은 뜻을 모르는 노래가 되고 있고, 노랫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연구는 기록에 의거하여 충실하고도 심층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며, 특정한 사실을 누락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제 기록을 중심으로 한 제대로 된 연구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아리랑의 뜻을 아는 것은 연구의 핵심이기 때문에 가장 관심이 집중되어온 분야이며,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 기록을 무시하는 왜곡된 연구 풍토로 인해 아리랑이라는 기본적인 뜻도 모르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더구나 아리랑이라는 어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아리랑 쓰리랑(<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대리랑(<본조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밀양 아리랑>),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진도 아리랑>) 등과 같이 문장 형태를 이루는 다양한 후렴구 속에서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였다.

문장 형태의 후렴구와 무관하게 아리랑이라는 기본적인 세 음절의 뜻을 제시한다거나, 아리랑 고개와 연결하여 땅 위의 고개로 보아 역사적 사실을 대입하려 한다거나, 아리랑과 쓰리랑이 분리된 두 개의 후렴구가 아니라 연결된 하나의 문장이라는 개념에서 아리랑 쓰리랑을 풀이하려는 단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아리랑의 뜻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는 조건하에서 다양한 후렴구를 풀이할 수 있어야 하며, 아리랑 사설에 대입하였을 때,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계속)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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