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포커스) 제주시 원도심에 꼭꼭 숨어있는 문화재들.. 한국전쟁 유적을 찾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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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포커스) 제주시 원도심에 꼭꼭 숨어있는 문화재들.. 한국전쟁 유적을 찾아 걷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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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돌아본 제주시 원도심의 역사의 현장

제주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는 지난 12일(일요일) 제주시내 원도심에 숨어있는 유적답사에 나섰다. 매월 제주문화유산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 모임은 이날 30여명의 회원들이 참가했다.

6,25전쟁유적을 찾아보는 이날 답사는 제주도의 숨어있는 문화유산을 개인적으로 한사람, 한사람 만나 직접 현장에 대한 얘기를 채록하며 차곡차곡 제주민의 역사를 정리중인 향토연구가 신영태(닉네임 탐라곰. 곰여행사 대표) 선생이 맡아 상세한 해설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날 행사는 신영태 해설가의 해설 외에 고영철 회장의 덧붙이는 설명으로 심도있는 탐사가 이뤄졌다는 평이다. 본지는 이날 행사를 직접 주관하며 해설을 곁들여준 고영철 회장의 허락을 받아 이날 답사기 전문을 게재하기로 했다. 제주시 원도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편집자주) 

 

원도심의 한국전쟁유적

답사 날인데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다소 걱정되기는 했지만 오후에 온다니까 괜찮으려니 하고 집합장소에 모였다. 어제까지 답사신청자는 29명이었다. 그렇지만 실제 모이는 사람 수는 늘 조금씩 달라진다. 아침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나오거나 신청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못 나온 사람과 신청 없이 나온 사람 수가 같아서 29명이 참가했다.

 

‘탐라곰’님이 안내를 맡을 때 한국전쟁 관련이라고 하니 조금 궁금했었다. ‘하루를 채울 만큼 많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내서를 보내온 것을 보니 생각보다 많았다. 내가 보태준 것은 제주방송국 터에 관한 것 하나뿐이었다.

처음 집결한 곳은 전농로에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 마당이다. 이곳은 오현단 북쪽에 있던 제주공립농업학교가 1940년에 이전하여 자리잡았던 곳이다. 

사친회장을 맡은 이윤희라는 분이 땅을 기증했다는데 무려 60,000평이었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지금의 삼성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는 제주중앙여자중학교까지였다는 것이다.

1951년에는 입학하는 1학년생은 제주제일중학교가 개교하면서 중학교 1학년이 되었고, 4학년생은 제주농업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제주도의 중요한 학교(제주고, 일중, 일고, 중앙중, 중앙여중, 삼성초)들이 생겨났거나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교육의 요람이다. 예전에는 제주시교육청과 학생회관도 이 부지 안에 있었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서 제주농업학교에 군정중대를 설치했다. 높다랗게 걸려 있는 성조기가 있고 반원통을 엎어 놓은 모양의 막사가 찍힌 사진이 남아 있다.

제주공립농업학교 운동장(출처: 제주4.3아카이브)

 

1949년에 이들이 떠났고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이곳은 곧 다시 군대가 접수했다. 제주도 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가 설치되고 이곳에는 그 예하 조직으로 제5교육대가 생긴 것이다.

학교 부지가 워낙 넓으니 해병대 제3기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해병대 3,4기는 제주의 자랑이라 할 만큼 유명했다. 3기는 일반인들이 지원했고, 4기는 주로 학도병들이었는데 이들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의 주역이 되었다. 

다만 지원하는 과정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마을별로 청년회에서 거의 강제로 입대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고, 학생들은 하교길에 지원서를 나누어 주면서 싸인하도록 하기도 했으니까….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한 분들이 전사하여 그 유해가 제주에 도착하자 이도일동 1362-1번지에 있는 관음사 포교당에 봉안했었다.

군부대가 들어섰으니 당연히 따라서 설치된 것이 병원이다. 해군 제3병원도 이 학교 부지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전쟁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딘 헤스 대령이 데리고 온 고아들도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황온순 여사가 원장을 맡은 한국보육원이다.

지금 신한은행이 들어선 자리에는 1950년에 제주방송국이 생겼다. 전황을 알리고 후방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다. 

방송국이라고 해봤자 겨우 나무를 이어서 세운 안테나 하나가 방송국임을 알리는 시설이었고 가청 범위는 제주시 洞지역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1952년 개국2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던 방송과장 김두규씨와 견습직원 2명이 무장대에 납치되어 희생되는 불행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1950년대 초창기 제주방송국의 모습으로 3개의 나무를 연결해 만든 안테나가 특이하다.

 

삼도이동 300-50번지(중앙로28길24)에는 후생주택이라는 게 남아 있다. UNKRA의 원조로 지어진 건데 당시 제주도민 거의 전부가 초가에 살고 있을 때인데 전쟁 피난민을 위해 계획된 원조를 어떤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삼도이동 184-5번지(남성로25길10)에는 성벽 위에 주택이 몇 채 남아 있다. 전쟁직후 어려웠던 시절 조그만 공간만 있어도 집을 지어야 했던 상황을 이해할 만하다.

전쟁 당시 피난민 중에 연극인들이 공연했던 제주극장은 현대극장으로 이름을 바꾸며 버텨 보았지만 지금은 철거해 버려 임시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 연극 공연으로 제주도에 연극 바람을 불러일으킨 공은 인정하겠지만 비슷한 나이의 제주도민들은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갔는데 그들은 안전한 이곳으로 피난와서 제 할 일을 즐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신영태 선생이 해설하고 있다
신영태 선생이 해설하고 있다

 

제주향교는 조선시대부터 제주의 교육을 책임져온 교육기관이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적을 남겼다.

1938년에는 제주서공립국민학교(나중에 제주동초등학교가 됨)가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한국대학이 제주향교에서 피난대학을 운영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도내에서는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국대학은 나중에 제국대학→서경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제주신보(단기4283.08.17.)에는 출전학도장행회, 제주농중서 성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학교에서 장행회를 거쳐 제주북국민학교에서는 제주도내 중학생들이 주축이 된 해병대 제4기가 출정식을 개최한 장소이며, 이들 해병 제4기생들이 1950년 8월 30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입대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시간도 없이 9월 1일 LST를 타고 제주항을 떠났다. 

여자 해병은 교사, 여의사, 중학생이 주가 된 126명으로, 8월 3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해병대 4기로 입대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장소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밖으로 떠돌며 공부를 이어가기도 했다.

칠성로에는 동백다방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당대에 뛰어난 여러 문인들이 활동의 터전으로 삼아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계용묵과 박목월이 그들 중에 있었고 박목월과 대학생 연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양중해가 ‘떠나가는 배’를 작사했다는 일화도 들어보았다.

장의원과 광제약국(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내가 학창시절에는 중앙로터리 남동쪽에 장시영산부인과 의원이 있었다. 위 사진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모습이다. 최근에는 그의 아들이 치과를 개원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장시영 의사는 4·3이 일어나기 전에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 김용철 학생이 고문치사당했을 때 2차에 걸친 부검 후 경찰의 계속되는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하였다.

 장의원이 계속 제주에 남아 있었으면 아마 경찰에 의해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그 직후 부산으로 피신해 있다가 전쟁이 나자 해군 군의관으로 지원해서 특히 제주 출신 해병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990년 4월 15일 해병대 사령관은 장시영을 명예해병 제1호로 위촉했다.

 

동문로터리에 있는 ‘해병혼’탑도 장시영 의사와 관련이 깊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군·관의 주도가 아닌 예비역 해병들이 앞장선 가운데 해병대 창설 11주년을 맞은 1960년 4월 15일 제막식을 가졌다. 이 사업의 추진위원장이 장시영이었고 전체 필요경비의 3분의1을 부담했다. 

그런데 탑에 새겨진 ‘魂’자를 자세히 보면 원래 한자와는 약간 다르다. 휘호는 김광추 선생의 글씨인데 해병혼의 글자 중 우변인 鬼 위에 붙은 꼭지(´)를 떼지 않으면 죽은 혼이 된다고 해서 그의 지론에 따라 귀신 귀자의 삐침별(부수)을 뗀 한자가 쓰여 있다.

 

11시가 넘으니 비가 꽤 크게 내렸다. 그래서 한참 동안은 관덕정 안에서 설명을 하기도 했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커피점에서 설명을 이어가기도 했다. 우리 답사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 사진=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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