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어원분석을 통한 탐라의 새역사 - 볼래낭개(甫木浦口)-섭섬(葉島):불래포구(佛來浦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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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어원분석을 통한 탐라의 새역사 - 볼래낭개(甫木浦口)-섭섬(葉島):불래포구(佛來浦口)
  • 이문호(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23.10.13 13:4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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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국(제주국제학교 차장), 이문호,(전북대 초빙교수)

제주도가 탄생한 역사적 비밀을 풀고자 제주도를 집중연구하고 있는 이문호 전북대 초빙교수가 최근  -어원분석을 통한 탐라의 새역사-볼래낭개(甫木浦口)-섭섬(葉島):불래포구(佛來浦口)라는 제목의 제주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이문호 교수는 이 논문에서 제주도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고양부 삼신인은 인도에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등신물과 좋은 물을 찾아 나선 부처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본지는 이문호 교수가 발표한 이 논문을 긴급입수, 이를 전문 게재하기로 했다. 제주도 탄생설화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편집자주)

 

 

-어원분석을 통한 탐라의 새역사-

볼래낭개(甫木浦口)-섭섬(葉島):불래포구(佛來浦口)

 

*이성국,제주국제학교 차장(미국인디애나주립대경제학과 박사과정수료)

이문호,전북대 초빙교수(서광출신,일본동경대와전남대공박,미국미네소타대포닥,통신기술사)

 

요약

물(水)의 신(神)인 발타라(跋陀羅, Bhadra:인도 북부지방 탐몰라주(耽沒羅洲:‘몰’자와‘주’자가 탈락되면서‘耽羅’ 저자는 탐몰라주는 인도북부지방명으로 토양특징이 ”물잘빠지(沒)는흙갈색 돌이널려(羅)있는지역“으로 풀이한 반면, 제주대 강영봉국문과교수는「한국고지명사전」에 등장하는 ‘제주의 옛 이름’으로 표기된‘탐몰라’는 법주기(法住記)에 등장하는 ‘탐몰라’를 원용한 것으로 ‘흙검붉은 곳’으로해석) 존자가 BC 563-483년경에 900명의 아라한(弟子)과 같이 탐라(BC483-AD1105 고려숙종때 탐라왕국이 고려에 한군현이됨)에 왔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물(神聖性, Heiligkeit,4대원소인 물,불,공기, 흙의하나)을 통한 불교의 전파와 세계에서 가장 큰 나한(한라는 나한이란뜻:拏漢:漢拏한라산의 한라의 역, 부록: 전주 황방산서고사(西固寺)나한전)의 돌(石) 등신불(等身佛)을 찾기 위해서다. 옛부터 제주사람들은 남녁에서 불어오는 태풍등을 한라산이 막아준다고해서 진산(鎭山Truth Mt.(5))이라고 부르는데,성불(成佛)한 거대한 나한이 한라산 화산폭발시에 불(火)에의해 백록담바위의 등신불로 굳어버린 모양새다.

오는 날 제주에서 발타라존자의 존자의 가장 큰 숨결은 올레길 1번 성산포 시흥리(始興里)에서26번 구좌면종달리(終達里)길이다. 바로 천부경(天符經)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은 끝이고(始卽終), 끝이 시작(終卽始)”을 타원형 제주에서 “길(道路Way)”에서 확실히 보여보여주며 한라산, 탐라 이름에서도 확인된다.증거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도 발타라존자 일행의 뗏목배는 타원형 탐라의 동쪽 끝이 뾰죽히 나온 성산포 섭지코지(곶串Cape발타라존자의900명의 아라한들이 성산포신양리 섭지코지:제주에서는 ‘지혜가 많은 사람의 곳’)에 도착 한 것으로 보인다.

섭지코지 어원은 지혜의신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이름 섭(葉)자와 지혜의지(智), 코지는 곳Place이 합성어인 ‘섭지코지’로 추정되며 발타라존자일행이 상륙한곳이란 뜻으로 저자는풀이하는데,성산신양리 마을지에서 정희복 교장은 俠地가 구개음화하여 섭지로 뜻은 ‘의협심 인재의 땅’으로 쓰고 있다.성산 혼인지에서 발타라존자의 3을나 Head가 바로 결혼, 신방을동굴(洞窟) 속에 차린다..

둘째, 서귀포보목리(볼레낭개로 불교가 들어 왔다는불래포구(佛來浦口)의 보목포甫木浦). 보목리 앞바다 ‘섭섬葉島’이 ‘섭’자도 ‘섭(葉)’지코지와 같은 글자이다. 보목라는 양을나의 집성촌, 보목리 해안은 따뜻한 날씨와 자리돔등 해산물이 풍부해서 양을나 아라한일행이 보목리포구로 들어온곳이다. 영실존자암에 볼레오름(佛來岳1280m)도 불교가 들어온 오름.

셋째, 3을나의 제2집성촌인 삼양리(三陽里)에 3은 고,양,부 3을나를 뜻하고 태양(陽)은 고양부 그룹900명 3팀리더가 태양(Three Sun)같은 절대군주자, 화북에 있는 삼사석비(三射石碑,3 Shoot Arrow Headstone)에서 보듯 활을 쏜사람 이 Head 고양부 3인.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지명(地名)만이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있다. 마을지명이 삼양(三陽)과 그부인인 벽랑공주에 벽랑도 지명이름인 삼양3동 이름이 ‘벌랑(伐浪)’의 변음으로 남아 있다. .

 

서론: 선사시대 탐라의 역사

역사 기록 이전의 제주의 先史 역사를보면, 언제부터 제주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김봉옥의 제주 통사에 기록을 요약했다.

① 1979년 제주대 박물과 애월읍 광령리 조개무지 발굴. 기원전 4세기 갈색무늬 토기 발굴.

② 1985년 대정읍 상모리 선사유적 공열토기(孔列土器) 발견.

③ 1986년 조천읍 북촌 토기, 골각기(骨角器) 발견.

④ 1988년 한경면 고산리 큰사발 발견, 1994년 가는 돌칼 6천여점 발굴로 기원전 8000년 전후 신석기 시대 초기로 상당한 문화수준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

⑤ 1997년 제주시 삼양동 원형수혈 주거지 유적 발견, 제주시 삼성혈 혈거지 및 삼사석비(三射石碑) 발견,삼양동은 3을나의 집단 적거지, 화복리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의 화살을 쏜 3사석비가 있다. 그림1-1 참조

그림 1-1. 고양부의 삼사석비와 탐라국발상지비

 

 

. 제주의 옛 이름을 보면,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7) 황룡사 9층 석탑 4층에 탁라(乇羅) 새겨져 있고 제주 탐라의 옛 이름으로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1105년(숙종 10년) 탐라를 탐라군으로 개칭했다.

1295년 충렬왕 21년에 탐라를 제주(齊州)로 고쳐 목사와 판관을 두었다. 고려 대장경 법주기 탐모라주(耽沒羅洲) 인도어에 비롯됨을 밝혀졌다.불교가 전해져온 성지로 구전에 의하면 절 오백 당 오백(寺五百 堂五百)이란 말이 있고 한라산 영실 불래악(佛來岳: 속칭 볼레오름)에 존자암(尊者庵)이 있다.

볼레오름(보리수:석가모니가 인도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달은 나무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영실(靈室)은 영수리(靈鷲)가 원음이고 5백 나한으로 둘러싸여있다.

1488년-1506년까지 제주에 귀향 온 홍유손(洪裕孫 1431-1529) 남긴글에 존자암에 대한 글이 있는데 존자암은 삼성(三姓: 고을나[髙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이 처음 일어날 때 비로소 만들어 졌고 3읍(三邑: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대정현[大靜縣])이 정립된 뒤까지 오래 정해졌다.

한가지 유의할 것은 성산포 혼인지에서 벽랑공주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결혼한 것으로 봐서 인도에서 발타라존자와 같이 온 일행으로 추정하며그때 오곡씨앗과 송아지,망아지,돼지등 짐승도 같이 싣고 왔다.

1601년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남사록에 존자암기가 나오고 1918년 이능화(李能和 1868-1945) 조선불교 통사에 보면 발타라 존자 권속 9백 아라한(阿羅漢; 불법을 닦아 세상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사람)과 더불어 탐 몰람주(탐라)에 나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법주기에는 발타라 존자가 석가가 돌아가신 뒤 기원전 540년 전후 9백의 아라한이 탐라에 나눠 살았다. 이 때는 2540년 전이다. 이는 옛 삼한(三韓) 시대이며 중국 춘추시대다. 근거는 제주 마을마다 절왓(寺田) 또는 절터왓(寺地田) 땅이름이 있고 그곳에 기와 조각이 나온다.

서광서리 넙게오름의 정상에 물통 근처에서도 기와장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탐라국이나 고려 시대부터 절을 지은 흔적인 절왓으로 추정되어 오랜 세월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고촌(古村)으로 봐진다. 존자암 터는 불래오름(佛來岳)의 중턱 해발 1200m 지점에 있다.

한라산등신불(1950m)은 오늘도 바람을 막아(Wind Castle)주면서 하늘에 빗줄기를 바람에 테워 제주 산하에 골고루 뿌려주고 있다. 장엄한 한라등신불을 산방산과 가파도에서 보면, 절로 고개 숙여진다.

태풍이 불때는 부딪치는 바람에 의해 등신불은 소리 내어 운다. 제주의 지정학적 (地政學Geopolitical) 위치로 BC200년경에는 중국 진시황제 가 불노초(不老草)를 캐러 500여명이 성산포 인근인 서귀포에 들렸고 정방 폭포벽에 서씨과차(徐市過此) 글귀를 남겼다.

발타라존자가 찾았던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은 1998년에 제주도민에의해 화산 암반수인 삼다수를 찾았다. 또 한라산 정남향 산남(山南) 모슬포에서 한라산(1950m) 백록담을 보면 영낙없는 등신불이다.

368개의 오름인 큰 나한(羅漢)들이 백록담 등신불 주위를 호위(護衛) 한다. 겨울철 북 쪽에서 오는 시베리아 찬바람이 백록담등신불의 돈내코 세로300m 가로 260m암벽을 넘으면, 찬바람이 온풍으로 바꿔지고 그바람은 단열압축(斷熱壓縮(Adiabatic compression)으로 제귀지풍(濟歸之風)이되어 서귀포,중문등이 겨울철 기온이 2-3도가 상승한다.

반면 여름철 서귀포 바다에서 불어오는 남풍이 한라산 백록담을 넘고 99골(谷)계곡을 지나는 귀제지풍(歸濟之風)일 때는 제주시는 무더위가 푹푹찐다. 원인은 돈내코 같은 암벽이 없기 때문.

성산포시흥,혼인지,온평리-구좌 종달 리가 고양부3을나의 탐라 정착 초기집성촌, 현재, 초기집성촌을 중심으로한라산 산북 방향중산간로1136을타고 도보로4시간이면 조천삼양의 3을나의 Head Quarter 집성촌에 도착하고, 반대로 한라산 산남은 중산간로1119를 타고 5-6시간이면 서귀-중문에 도착한다.물론,교통편은 도보나 말을 타고 왔다고본다.

성산포 인근 우도(牛島)는 소머리섬 , 불가에서는 진리의 상징, 바다에 심우도 (尋牛圖)를 그려놓은 게 우도, 소는 우직,성실, 온순하고 끈 질긴성격으로농경중심사회에서 동력 수단으로 밭을 갈았다. 영어의 알파베A 자도 소의 머리형태에서 나왔다.사계리 山房山 마당 용머리 바다 에서 “가파도는 부처의 가피(加被) 입고,마라도의 마라는 ’번뇌(煩惱)를 께라‘ 불법에서 나온 말이다.,

‘가파도-마라도’ 이름을 은유적으로 작명한게 아닌가 추정한다.집성촌들이 바닷가를 낀 웃드르를 택한이유는 소와말 가축을 키우기쉬울뿐아니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들판이 있기 때문이다. 벽랑공주일행이 갖고 온 오곡씨앗과 송아지,망아지, 돼지, 닭 등이 집성촌이 유익한 정착1호 재산이 됐다.

물론, 말은 한라산중산간로를 달리면서 수렵시 필수적이었다. 서광과 보성사이 ‘들판에 화쌀 쏜드르’가 있고 암석바닥에 구멍이 셋 나있다.

 

2.쿠루시오해류(黑潮,Kuroshio current해류=벽랑(碧浪,벌랑伐浪)공주,수로만리의 거센파도를 ‘공주(公主)’로 의인화( 擬人化):

벽랑이 거치른 검은파도, 그이름이 남아있는 곳은 3을나의 제2집성촌인 제주시삼양3동해변가마을이름이 벌랑(伐浪 파도가치다), 화북1동 한천어귀가 벌랑포그리고 제주시 3도동과 용담2동 사이가 벌랑포구 (伐浪浦口). 역사의 흔적이 뚜럿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벽랑공주의 초기이름은 벌랑공주, 그 후 제주사람 입맛에 붙는 벽랑공주로 진화 된 것같다.

발타라 존자는 인도 뱅갈만-인도양에서 쿠루시오(黑潮,Kuroshiocurrent)해류를타고 필리핀-일본해-탐라 성산포온평리혼인지에 왔다. 온평리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영등할망상이있는데, 영등서북풍바람이1월에 우도(牛島)로들어와봄의 풍요를 곳곳에 주고 다니다가2월 초 한림귀덕리포구에서 태평양바다로 나간다.

관련일화는 바다에서 고깃배가가 난파 됐는데 영등하르방을 만나 “관세음보살”을 계속암송하면 고향으로갈 수있다고 했고 마침내, 고향에 당도하였고 이말이 소문이나 어촌에서는 송구신영(送舊新迎) 영등굿을 해마다 하며 쪽배에 액(厄)을 태워 바다에 띄운다..

또,제주에는 “당(堂)5백 절 (寺)5백” 이란 말이 있다. 신의 18,000 있다고하여 “신(神)의고장”이고, 절(寺)의 각마을마다 있다고 하여 “절(寺)의고장에서” 나온말인데, 절을 지었던 자리인 절왓(田)은 오늘날 그대로 전해지며 기왓장등이 발굴되고 있다..

쿠루시오해류는 북태평양중위도 아열대순환의 서안경계류로서,북적도해류의 일부가 필리핀 동쪽해역과 동중국해를 지나 일본 남쪽으로 북상한 후 북위 36° 부근에서 동쪽으로 흘러가 북태평양해류와 연결되는 해류이다.

쿠로시오란 일본어로 흑조(黑潮), 영어로는Kuroshio라고 하며, 해수의 색이 암흑색으로 보이는 것에서 유래했다. 난류인 쿠로시오해류는 영양염과식물성 플랑크톤, 혼탁물이 적어 바닷물이 매우 맑기 때문에 태양빛 중 청남색을 많이 투과시켜 검게 보이는 것이다.

일본의 남쪽에서 쿠로시오해류는 폭이 약 100km이며, 해수면의 수위가 연안 쪽에 비해 외해(外海) 쪽이 약 1 m 높다. 해류의 흐름은 사행(蛇行) 또는 직진(直進)하며 계속 변동하고, 최대 유속은 약 2.0∼2.5 m/s로 매우 빠르다.

사행하는 쿠로시오의 주변에는 다수의 난수성 또는 냉수성소용돌이(eddy)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발타라존자 일행900명은 인도북부 뱅갈만 을지나 인도양-필리핀 –쿠류시오를타서 일본해를 지나면 성산포 섭지코지(곶串) 인 온평포구에 닿는다.

인도와 탐라이하늘길은5-6천Km, 비행기로 약 8시간, 해류는 돌고돌아 오기 때문에 약 1만 km, 한달이상 뗏목배가 걸릴것으로 봐 진다. 제주해를 돈 쿠류시오 해류는 님해 진도항의 울돌목을 거치고 황해로 올라타 백령도와 장산곶(長山串)에 인당수(印塘水)를 거친다.바로이순신장군의 명랑대첩과 심청이 이야기가 있다.

쿠류수오 해류 사진-

 

 

2.1.이순신장군이 명량대첩의 울돌목

조선조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鬱陶項: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명량해협[鳴梁海峽],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와 진도(珍島)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우리나라에서조류(潮流)가 가장 빠른 곳으로 유명한데, 지형적으로 폭이 좁은 데다가 수심이 얕아 조류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살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가 큰 편으로, 밀물과 썰물에 의한 바닷물의 이동이 많은 것도 이곳의 물살이 빠른 요인이 된다.

해협 중 폭이 가장 좁은 곳은 약 300m 정도이며,유속은 수심 전반에 걸쳐 평균 5.5m/s,바다 표층은 최대 6.5m/s에 달한다. 특히 조차가 가장 큰사리(대조,大潮) 때 가장 빠르다.좁은 지형에 대량의 물이 지나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도 하며, 물살로 인한 소리가 매우 큰 것이 특징인데, 예로부터 바위가 우는 것 같다는 의미로 '울돌목'이라 불렸고,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명량(鳴梁)'이다.

명량해협은임진왜란때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함대를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배경은 조류가 빠른 명량해협의 지리적 요건을 이용한 데 있었다.쿠류수오 해류의 급한 물살이 불후의 이순신장군을 낳았다.

2.2.심청이 이야기:아버지 심봉사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백석에 팔려 제물이되는 곳이 인당수(印塘水), 경기도 백령도(백령도에는 심청이 사당이있다) 와 장산곶(串) 사이 물길이 세기로 유명하다.이 이 바닷물 해류도 쿠로시오 해류다.15세 이하 동정녀 처녀를 공양(供養)하면서 건너는 바다.

전주서고사 나한전( 사진 제공 이순종박사, 통신,기계안전 기술사)
서울 북한산 삼천사 나한전

 

 

 

 

 

 

 

 

 

 

3.벽(벌)랑공주

발타라존자일행은 오곡씨앗과 소, 말, 돼지 짐승들과 같은 것들을 뗏목배에 실어 인도에서 탐라까지 바다 길 약 1만 Km을 건넌다. 그 바다 길은 ‘수로만리(水路萬里)’. 전설에 의하면 벽랑공주는 벽랑나라의 공주인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유인즉, 거칠은 파도길(벽랑(碧浪))인 쿠로시오해류를 헤치고 나오기 위해 파도가 잔잔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되어 쿠로시오해류를 “아름다운 공주”로 의인화한 이름이 “벽(벌)랑공주”로 추정된다.

거친파도가 잔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동정녀를 바다에 공양하는 심청이에서 보듯, 고대(古代)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액(厄)을막기위해 인신공양(人身供養)풍속이 있었다.

또한, 동정녀처녀3명도 900명 아라한들과 같이 동행했다. 아라한 900명이 지도자 고, 양, 부 세 사람의 세그룹 Leader,각각 세그룹은 고을나(300명), 양을나(300명), 부을나(300명)이 뗏목배를 타고와 혼인지(婚姻地성산포)에서 결혼했다.

혼인지는 연못옆 들판, 발타라존자가 물의 신(神), 연못옆에 결혼식장을 꾸린 것은 당연한 일. 그 후 한라산과 가까운 평야 들판인 삼양(三陽)에 고을나, 삼양 인근 도련(道連)에 양을나 집단 촌락을 형성하고 움집(몽고에 유목민 집과 비슷하지만 집 입구에 정낭 설치, 竪穴住居(수혈주거로 반지하 가옥. 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워 이엉을 덮어 만들었다.

바닥은 대개 진흙을 깔고 움집 안에는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을 설치했다. 날이 갈수록 움집은 지상가옥에 가까워지며 화로나 저장 구덩이는 밖으로 돌출시킨 감실(龕室)에 설치됐다.겨울 양식인 고구마저장 땅속 구덩이를 파서 저장했다.

60-70년대 까지만해도 제주 웃드르(上野) 중산간농촌에서 사용되었다)에 살았으며, 부을나는 삼양에가까운 조천에 대흘(大屹) 와흘(臥屹) 선흘(善屹)이라는 곳에 살았다. 또 한, 인근 화북리(禾北里)에서 화살을 쏘아(삼사석三射石) 거주지를 정하였다.

그 방법은 화살이 멀리 나간 사람이 제일 큰 형이고 그다음 멀리 나간 순서로 거주지를 정했다..한라산 영실에 수도사(修道寺), 각마을에 포교사(布敎寺)를 설치했다. 삼양리위 마을인 회천(回泉)리에도 고,양을나제2에 집성촌이 형성됐다. 삼성혈 (三姓穴)에는 고,양, 부 3姓 제단(祭壇)을 쌓아 모셨다.

특히, 삼양(三陽)에 3은 고양부란 뜻이고 양(陽)은 태양 양, 900명 아라한 의 리더란 뜻. 고양부 3리더는 절대 군주로 삼양(三陽,Three Sun) 이었다.

 

4. 발타라존자 아라한 3을나의 점성술을 이용한 항해술과 집성촌의 설계

강문규 한라산 생태문화유산연구소장의 발표에의하면(8), 3을나의 집성촌 설계를 별자리를 보고 집성촌을 나눴다고 했다. 고대 인도와 중국은 점성술문화(Astrology Culture)가 발전되었는데, 발타라존자일행도 쿠루시오해류약1만 Km를 항해해 올 때도 하늘에 북두칠성 별자리를 보면서 탐라를 찾았다,

탐라시대 전기에 취락이 형성된 안덕면 화순리 안덕계곡 하류지역인 남부화력발전소 상단 일대에는 고인돌과 바위에 새긴북두칠성 별자리 가 잘 남아 있다.

별자리를 이용한집성촌 설계는,제주시일도동( 지금의 칠성로 일대 (북두칠성의 자루부분인 별 세 자리가 있는 지역)은 삼을나의 맏형이, 이도동과 과 삼도동은 밑에 동생 둘이 주걱부분의 4개 별자리를 두개씩 차지하고 있는 형태로 나눠 살았다.

칠성로 끝에는 바다 해변밑에서 산지천이 솟아나는 곳으로 집거지에 최적의조건을 같췄고이도동은 가락코천, 삼도동은 병문천을 끼고 있다.

성산포 집성촌이경우도 북두칠성 별자리(자루3,주걱4)가 마을 형태로 투사됐는데,제1집성촌은 섭지코지(1)-혼인지(2)-온평리(3)-성산일출봉(4)-성산시흥리(5)-구좌종달리(6)-우도(7)이고 제2집성촌은 화북(1)-삼양(2)-도련(3)-조천(4)-봉개(5)-대흘(6)-명도암(7)으로 1234567별자리 순으로 마을이 조성됐고 이어 삼사석에서 활을 쏜 후 제주시 고을나의 1도동-양을나의 2도동-부을나의 3도동이 ‘주걱’모양으로 확장된다.

한편, 제주도 마을에초가집의 안채와 바깥채도 북두칠성의 “자루와 주걱”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바람길을 터주며 안과 바깥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북두칠성을 밥이나 국을 뜨는 “주걱( Rice Paddle)과 자루(Sack)”를 연상한데 비해 서양에서는 큰곰(Brown Bear)의 모습이나 밭을 가는 삽(Shovel)과 같은 기구를 상징했다.

탐라의 북두칠성에 관한 자료는 1530년 (중종 25) 이행(李荇) 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칠성도(七星圖)’기사가 최초의 기록이다.「칠성도: 주성 안에 있다. 돌로 쌓은 옛 터가 있다. 삼성이 처음 나와서 삼도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대를 쌓아 나누어 살았다.

그 때문에 칠성도라 부른다(七星圖=在州城內石築有遺址三姓初出分占三徒倣北斗形築臺分據之因名七星圖) 이 후 등장하는 사료들은 대부분『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사료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위 기록을 시작으로 탐라도의 북두칠성에대한자료는, 임제의『남명소승』(1577), 홍천경의「결승정상량문」(1599), 김상헌의 『남사록』(1601), 이원진의 『탐라지』(1653), 이형상의 삼성묘상량문」(1702), 18세기 초로 추정되는 「제주읍성도」, 김정의 「수축월대칠성도」 (1737), 신광수의 『탐라록』(1764),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3), 19세기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는 홍종시의「제주성내고적도」(1979), 김석익의「파한록」(『심재집』,1923), 「매일신보 기사 및 사진」(1926.5.11일), 담수계의 『증보탐라지』(1954)가 시대별로 존재하고 있다고 강문규선생은 말하고 있다.(8).

 

5. 결론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타원형 탐라지도에서 보듯, 동 쪽 끝 성산포시흥리(始興里)가 올레길 1번에서 출발하고 돌고돌아 시흥리 왼쪽 끝마을인 구좌 지미봉(地尾峰) 종달리(終達里)가 26번 종점이다.시흥리와 종달리가 거의 붙어있어 출발점과 종점이 같다.

천부경(天符經)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은 끝이고(始卽終), 끝이 시작(終卽始)” .즉 올레길 1번인 성산일출봉(日出峯) 시흥(始興)에서 시계방향으로 출발해서 올레길 7번 서귀포와 성산포에서 반시계방향으로 출발해서 종달리를 지나 올레길 16번 애월 고내까지 고,양,부을나의 집성촌 들이 듬성 듬성 산포되었는데 특징은 짐승사냥과 나무 열매 채취, 바닷가 미역채취,고기잡이를 하면서도 식량을 더 해결할 수 있는 농사를 짓기위한 들판과 마실 물을 찾았고 물가근처를 끼는 곳에 집성촌이 들어섰다.

특이한곳이 모슬포 인근 서광서리는 고을나의 집성촌,남송이오름(해발340m)과 넙게(Crab)오름이 동네를 받치고 있다. 전하는 바에의하면, 들짐승이 많이 살고 독수리도 많았던 유명사냥터.. 넙게오름 8부정상에 분화구인 굼부리(火口)가 있고 굼부리에 고을나가 살았다고 추정되는데, “흙비 내리니 장독대 두껑 닫으라” 란 전설이내려온다.

남송이오름이 원래 이름은 “나르는 수리(비취飛鷲 Flying Eagle).”이고 곶자왈(수藪)에,오설록 녹차밭, 영어교육도시, 신화공원이 들어선 제주제일이 신도시다. 독수리 둥지(‘텅애’ 제주사투리) 는 남송이 오름앞 ‘생기(生氣)’동산물에 있다.

인도에서 탐라까지 수로만리길을 건너온 발타라존자에 의해서 각 마을에 인도 풍속이 전래 됐다. 예를들어, 집 올레에 세 개의 정낭(錠木 Gate)은 오늘날 스마트폰 010 원리(6)와 DNA 유전자 코드 원리,특히 Covid-19에서확인된다.(7),집에 붙어있는돗통시(변소), 쇠똥을 말려 땔감으로 사용과 장(葬)났을 때, 대나무를 쪼개서 되지고기를 꿴 적(인도인은 숟갈없이 멘손가락으로 식사에서 비롯됨) 등이다..

현재 제주에 고씨 집성촌은 한경면 고산리, 안덕서광리, 구좌한동리,조천리이고 양씨는 보목리, 애월 상가리,화순리 남원 신예리,조천리이며 부씨는 구좌 하도리등 성산포를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됐다. Sea Silk Road의 불교 전래 년대는 855년 전으로 본다.

발타라 존자가 BC 563-483년사이에 탐라에온 시점에다 우리나라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불교가 전래 됐으나,탐라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약 이보다 855년 앞선(372년+483년=855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지도

 

혼인지

 

 

참고문헌,

1.쿠로시오해류[-黑潮, Kuroshio current] (지구과학사전, 2009. 8. 30., (사)한국지구과학회)[네이버 지식백과

2. 이문호, 제주의 門: 서귀포문화원 2015

3. 이문호 , 한라산은 부처다, 제민일보 ,1997 9.15

4. 김봉옥 , 증보 제주통사, 도서출판 세림,2000.9

5.Moon Ho Lee, Jeong Su Kim,“The Natural Intelligence of the Wind Castle Design with the World Natural Heritageof Jeju Island”

Springer Nature Switzerland AG 2021,Z. Hu et al. (Eds.): AIMEE 2020, AISC 1315, pp. 237–247, 2021.

https://doi.org/10.1007/978-3-030-67133-4_22

6.Moon Ho Lee, “The History of Jeju Jong Nang Binary Code.“ IEEE Vehicular Technology Society News, Vol.50 No.1 Feb. 2003.

7.Sung Kook Lee and Moon Ho Lee,”The COVID-19 DNA-RNA Genetic Code Analysis Using Double Stochastic and Block Circulant Jacket Matrix“,IntechOpenBooks, Matrix Theory - Classics and Advances,December 22nd, 2021 Published: April 17th, 2022,DOI: 10.5772/intechopen.102342

8.강문규,”제주별문화의 가치와 활용방안“,신화에서역사로-남극노인성과서귀포문화유산.(사)탐라문화유산보존회, 2023.6.23. 서귀포시청 세미나실

별첨 사진

A. 쿠류수오 해류(벽랑 공주) 사진—출처:해양 수산부

사진, B. 명량해협의 해저 지형 단면도

C. 사진 백령도 심청각과 심청이—출처:https://blog.naver.com/ttpp2002/221095900554

사진,D1. 제주도 올레길지도

D2. 성산포 혼인지

 

사진 F. 서울 북한산 삼천사 나한전

사진 E 전주서고사 나한전( 사진 제공 이순종박사, 통신,기계안전 기술사)

부록:한라산 漢拏山(漢 한수 한 拏 붙잡을 나(라) 山 메 산1950m)어원해석

제주도(濟州道) 중앙(中央)의 주봉. 산 위에는 둘레 3km, 지름 500m의 대(大) 분화구(噴火口)였던 백록담(白鹿潭)이 있고, 산허리에서 산기슭에 걸쳐서 368 개의 측화산(側火山) 오름이 있다. 화산체(火山體)는 주(主)로 제3기 말에서 4기 초의 암류와 그 후의 현무암(玄武巖)으로 이루어졌으며, 1002년과 1007년에 분화(噴火)하여 많은 용암(鎔巖ㆍ熔巖)을 분출(噴出)시켰는 데 지금은 휴화산(休火山)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치며, 북쪽 기슭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은 도민(道民)의 창조(創祖)인 세 신인(神人)이 용출한 곳으로 유명(有名)하다. 참나무ㆍ산벚나무ㆍ단풍나무(丹楓--) 등(等)의 모목을 비롯하여, 삼대(三帶)의 식물(植物)이 울창하다. 학술(學術) 연구(硏究) 자료(資料)의 수집(蒐集) 장소(場所)이다.

박용후의 제주도옛땅이름연구(1992년,제주문화)에 의하면, 漢拏의 한(漢)은 은한(銀漢: 은하수)를말하고나(拏)는 끌거나 손으로 잡는다는 뜻으로 은하수를 끌어 잡을 수있다는 뜻으로 산이 높은 것을 뜻한다로 되어있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 ,한라(漢拏)는 거꾸로 읽으면 라한(拏漢:일체번뇌를 끊고 께달음을얻어중생의공양에 응할만한 불교의성자:Arhat란 뜻이다,

참고로 절에 나한전이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는 두곳: 전주 황방산 서고사(黃尨山·西固寺)(십육나한 중 제3존자 가낙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惰闍), 제5존자 낙거라란 뜻이다.(諾距羅), 제7존자 가리가(迦理迦), 제14존자 벌나파사(伐那婆斯), 제16존자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 다섯나한)의 탱화를모신 나한전(拏漢殿)있고 서울 북한산 삼천사에 나한전이 있다.

한라산의 나한(拏漢은 붙잡아라 또는 찾아라, 무엇을? ‘물한자 즉 물(漢)을’. 뜻은 ”물을 찾아라“ 이고 이때의 물은 Phical Water 뿐만아니라 Religious Buddha를 뜻한다.1980년대까지해도제주웃드르에는 봉천수를 마셨다.제주에서 물은 생명수다.중산간마을 봉천수는 한라산 백록담(白鹿潭) 굼부리에 고인 산정호수 봉천수에서 비롯됐다.

또한, 영실 기암과 오백 나한(靈室奇巖 五百羅漢)도 한라산 라한 등신불을 받들고 있다. 한라산 정상의 서남쪽 기슭에 해발 1,600여m의 위치에서 아래로 약250여m의 수직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영실에 있는 기암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이 영실기암이다. 나한(羅漢)은 바위에는 羅漢 , 나한(拏漢)은 사람또는 의인화( 擬人化)일경우에 사용되는 말이다. 영실에 오백 나한(羅漢)과 한라산을 의인화 나한(拏漢)을 예로 들 수있다.

** 본논문은 문화기술융합 논문지2023년 7월호에 게재됐고, 한국불교학회 창립50주년 국제논문 발표(2023.11)에 부분적으로 발표됩니다. 본 논문은 2015년 서귀포 문화원의 부분적인 지원을 받아 제주문화의 뿌리에 원형을 찾게 됐음을 감사드립니다.특히, 서귀포 보목리의 볼래낭개-섭섬:불래포구(佛來浦口)는 10월4일에 찾은 연구결과입니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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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23-10-14 04:55:24
@ 그 동안 제주도에 대한 연구 자료 중에 특이한 내용 접하게 되어 반갑다. 그 이유는 육지로 올라온 뒤에도 한라산을 구심점으로 펼쳐진 새로운 문화역사를 알게 되어서다. 제주도하면 3성씨 고양부. 실제 제주도에 근무할때 3성씨를 많이 만나지 못했다. 소위 모자리판 같다는 표현의 집성촌 위치를 잘 몰랐던 무지 탓이다. 대정읍 가까이에 법환포구는 늦여름 태풍이 올라올때 뉴스로 많이 접해 익숙했다. 그곳이 불교의 입항지며, 영실 존자암 가는 길목으로 인도 불교문화와 지명 깊이를 같이한다고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식수로 제주도 삼다수 , 청주 진로석수다. 무심천발원지 찾아 깊은 산속을 오르다가 석수공장을 만났다. 뿌리찾는 여행은 우리에게 늘 신선한 활력소를 내준다. 제주도와 인도가 자매결연 맺으면 아주 좋겠다

선인장 2023-10-14 04:35:04
@ 그 동안 제주도에 대한 연구 자료 중에 특이한 내용 접하게 되어 반갑다. 그 이유는 육지로 올라온 뒤에도 한라산을 구심점으로 펼쳐진 새로운 문화 역사를 알게 되어서다. 제주도하면 성씨는 3성, 득 고,양,부씨다. 실제 재주도에서 근무할때 3성을 그리 많이 만아지 못했다. 소위 모자리판 같다는 표현의 집성촌이 어디에 있는지 잘몰랐던 무지 탓도 업지 않다. 대정읍 가까이 주변에 법환포구하면 늦여름 태풍이 올라온다는 뉴스의 현장 스케치를 접해서 익숙했다. 그곳이 불교의 입항지며, 영실 존자암 역시 인도 불교문화와 지명의 깊이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식수로 제주도 삼다수 듯이 청주 진로석수다. 무심천발원지인 깊은 산속에 공장이 있다. 뿌리를 찾은 여행은 신선함

권기열 2023-10-13 18:44:51
논문 발표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탐라의 새역사에 대해 이 논문을 보고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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