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0)..영화 '남한산성'의 그 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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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0)..영화 '남한산성'의 그 김상헌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0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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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절문(切問:간절히 물어봄)】

○ ‘남녘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온 기록’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은 어떤 책인가?

○ 최부(崔溥)의 <탐라시(耽羅詩 삼십오절(三十五絶)>이란 시가, 그의 문집인 《금남집(錦南集)》에는 실리지 않고, 청음의 《남사록(南槎錄)》에만 실려 소개된 이유는 어째서일까?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선조(宣祖) 34년(1601)에 안무어사(按撫御史)로 제주로 내려오게 된 직접적 배경이 된 ‘소덕유(蘇德裕) ‧ 길운절(吉雲節) 사건’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펼쳐진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尙憲)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의 인물론에 대해서 논한다면?

○ 안동김씨(安東金氏) 출신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후손들이 특별히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어째서인가?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과 관련된 대표적 유적지는?

(1) 묘소 및 석실서원(石室書院) 터(경기도 남양주시) - 안장지

(2) 청원루(淸遠樓) 및 목석거(木石居)(경북 안동시 풍산읍) - 은거지

(3) 무궁화동산(서울시 궁정동, 청와대 옆 전 궁정동안가 터) - 태생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걸어온 길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응해 군대를 파견키로 했다는 소식이 안동 풍산에 낙향해 있는 청음 선생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당시 학가산 아래의 목석거(木石居)에서 야인처럼 살던 청음 선생은 이에 급히 파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탐지한 청나라 조정에서 급기야 김상헌을 심양(瀋陽)으로 끌고 가서 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한다.

조선을 떠나기 전 남긴 감회를 담아 읊은 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림 ()> 영화 <남한산성>의 포스터

 

얼마 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이 인기리에 상영된 적이 있다. 본래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원작으로 해 지난 2017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작품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인 이후 작중인물의 인물론에 대해 서로 상반된 견해를 내보이며 종종 이들을 화제의 대상에 올리곤 한다.

급기야 척화파(斥和派) 김상헌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이 쓴 항복문서를 찢을 정도의 기개를 선보이면서 오랑캐에 불복한 비타협적 인물로 각인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내린 일반인들은 당시 척화파의 대표인 청음 김상헌을 두고서 ‘그가 용감하긴 했어도 국제정세에 어두웠다’라고 쉽게 치부해버리기까지 한다. 이게 섣부른 예단이란 건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의 직책이 예조판서(禮曹判書)였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조판서란 오늘날로 치면 외교통상부 장관에 해당한다. 그런 그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기본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의리의 명분상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그의 저변 인식이,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더 강하다’는 현실 인식을 뛰어넘게 만든 요인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듯하다.

한편 이규경(李圭景)이란 학자가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란 책에서 논한 〈동국(東國) 제일의 인재(人材)에 대한 변증설〉에 보면, “이황(李滉)의 덕(德), 최립(崔岦)의 문(文), 유형원(柳馨遠)의 경륜(經綸), 이순신(李舜臣)의 도략(韜略), 김상헌(金尙憲)의 절의(節義), 남이(南怡)의 무용(武勇) ….” 등을 제일로 꼽고 있기도 하다.

청음은 선조(宣祖) 3년(1570)에 지금의 청와대 옆 궁정동에 있던 외조부 정유길(鄭惟吉)의 집에서 태어났다. 청음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생부는 김극효(金克孝)이고, 양부는 김대효(金大孝)이다.

집안은 모친인 동래정씨(東萊鄭氏)가 더 명문가였는데, 외조부인 정유길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고, 외고조인 정광필(鄭光弼)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낼 정도였다.

청음이 16세 되던 해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고, 21세 되던 선조 23년(1590) 가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 되던 선조 29년(1596) 겨울에 정시(庭試)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벼슬길에 나선 이듬해인 선조 34년(1601), 제주도에서 발생한 역모 사건으로 흉흉한 민심을 위무하기 위해 안무사로 제주도에 파견돼 6개월간 머물게 된다.

청음은 제주에서 안무사(按撫使)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생들에게 학업을 권면하는 한편, 억울하게 역적을 몰린 사람들을 풀어주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또한 순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에 기초해 제주도의 갖가지 폐단을 개혁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그림 ()> 청음 김상헌 선생 시비 – 서울 장의동 생가터(현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안무어사(按撫御史)로 제주에 내려오게 된 사연 – ‘소덕유(蘇德裕) ‧ 길운절(吉雲節) 역모 사건’

 

“선산(善山) 사람 길운절(吉雲節)이 익산(益山) 사람 소덕유(蘇德裕)와 해남의 승려 혜수(惠修) 등과 더불어 제주에 들어와서 은밀히 제주 사람인 문충기(文忠基), 홍경원(洪敬源) 등 10여 명을 꾀어 목사 이하 삼읍의 수령을 죽이려는 반란을 도모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거사하려 했는데, 마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의가 누설되어 운절(雲節)이 자수하였다. 드디어 덕유(德裕), 충기(忠基) 등 20명을 잡아 서울로 계송(械送)하고 그들을 심문해 죄가 인정된 자들은 모두 법에 따라 형벌을 집행하였고, 그 나머지 연루된 죄인들은 모두 용서하고 불문에 붙였다.…”

 

《남사록(南槎錄)》이란 책 맨 앞에 소개된 이 사건의 개요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을 다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宣祖) 34년 신축(辛丑, 1601)> ‘7월 18일’조에 보면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건의 내용이 중요하기에 그날의 기사 전문을 옮긴다.

“처음에 선산(善山) 사람 길운절(吉云節)이 어려서부터 흉패(兇悖)하였는데 속으로 엉뚱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항상 지략(智略)이 있다고 자부하였다. 임진년 후에 그의 아비 회(誨)가 벼슬하다가 경성에서 죽었는데도 고향으로 모시고 가서 장사지내지도 않았으며, 정유년 난리 때에는 근왕(勤王) 한다고 칭탁하고선 어미를 버려둔 채 돌보지 않아 적에게 죽임을 당하게 했다.

이 때문에 그 고장 사람들이 모두 쫓아내자 마침내 흉악한 계책을 세우고는 전라도 익산(益山) 사람 소덕유(蘇德裕)와 함께 역모를 꾀하였는데, 덕유는 바로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첩의 사촌(四寸)이었다.

덕유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던 때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고, 난리가 일어난 뒤에 승장(僧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었는데 선산(善山) 지역에서 산성(山城)을 쌓을 때 운절과 서로 사귀게 되었다.

운절이 덕유를 자기 집에 있게 하면서 의식(衣食)을 함께하기도 했는데, 덕유가 ‘지금 같은 난세에 그대의 재주를 크게 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니, 운절이 ‘나도 본래 그런 뜻이 있긴 한데 장차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자, 덕유가 ‘그대가 만약 대사(大事)에 뜻이 있다면 나에게 한 계책이 있으니, 그 방도를 가르쳐 주겠다.’ 하였다.

운절이 그 계책을 묻자, 덕유가 ‘기축년에 정여립(鄭汝立)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있던 곳이 넓고 트인 곳이어서 그 일이 미리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벽지(僻地)나 절역(絶域) 등지에 있으면서 도모한다면 어찌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겠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제주(濟州)로 가서 몰래 이 일을 도모할 터이니, 만약 일이 성공하면 사람을 시켜 그대를 부르겠다. 그곳은 인심이 완악(頑惡)하니 쉽게 유치(誘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운절이 매우 그럴 듯하게 여겨 마침내 덕유를 보내면서 말을 사들인다고 칭탁하고 청포(靑布)를 가지고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때가 기해(己亥, 1599)년 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덕유는 제주로 들어간 뒤에 풍수(風水)와 화격(畫格) 등의 일로 읍(邑)의 토호(土豪)들 집을 드나들며 몰래 불궤(不軌)의 일을 꾀하였다.

당시 목사(牧使) 성윤문(成允文)이 마침 형장(刑杖)을 엄혹하게 다뤄 크게 민심을 잃었는데, 이때를 틈타 선동하여 본주의 대성(大姓)을 유인하여 결탁하니 납마 첨지(納馬僉知) 문충기(文忠基), 훈도(訓導) 홍경원(洪敬源), 교생(校生) 김정걸(金挺傑)ㆍ김대정(金大鼎)ㆍ김종(金鍾)ㆍ이지(李智) 등이 모두 허여하였다.

이에 덕유가 그의 무리인 승려 혜수(惠修) 및 해남(海南)에 사는 권용(權龍)이라는 사람을 보내 글을 가지고 가서 운절을 부르니, 운절이 그의 조카 최구익(崔九翼)을 대동하고 제주로 들어가 덕유와 함께 약속하되, 문충기 등이 6월 6일을 기하여 기병(起兵)해서 목사 및 서울에서 온 관리들을 다 죽이고 그 군량(軍糧)ㆍ군기(軍器)를 점거하는 한편 전마(戰馬)를 많이 내어 조발하여 바다를 건너 곧바로 경성을 침범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4일 성중에서 그의 무리를 모아 거사를 모의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때 마침 운절이 그의 무리와 몰래 말을 나누는 것을 간통한 기생 구생(具生)이 엿들었다.

구생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운절이 숨기니, 구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에게 바른 대로 말하라. 내가 다른 말은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나 목사를 죽인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내가 폭로하겠다.’ 하였다.

운절은 사세가 부득이 한 데다가 또 생각하기를 ‘성사된 뒤에는 본도의 병권(兵權)이 모두 문충기의 무리에게 돌아갈 텐데 내가 외로운 신세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보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여 마침내 고변(告變)하기로 결심하였다.

대개 운절이 가장 먼저 역모를 꾀하긴 하였으나 사실은 두 갈래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에 올 때부터 미리 고변할 정문(呈文)의 초고를 만들어 두었는데, 이때 와서 바친 것이다.

성윤문이 판관 안극효(安克孝), 서울서 온 점마별감(點馬別監) 정덕규(鄭德珪) 및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연경(李延慶) 등과 함께 성문을 폐쇄하고 군사를 내어 수색해서 괴수 18인을 체포한 뒤 형틀에 묶어 올려보내고 윤문이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였다.

운절이 또 통모한 그의 무리가 육지의 해변에 많이 있다고 말하자, 윤문이 비밀히 병사(兵使) 안위(安衛)와 체찰부사 한준겸(韓浚謙)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즉시 덮쳐 잡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해남(海南)에 사는 강유정(姜惟正), 영암(靈巖)에 사는 한희수(韓希壽) 등을 모두 형틀에 묶어 올려보내고, 권용(權龍)은 해남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는 도망하여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병사와 체찰부사 역시 각기 사유를 치계(馳啟)하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기간이란 조선의 국내외 형편상 민생이 파탄이 나고 피폐(疲弊)할 정도로 극도로 사회가 불안하고 어수선했다.

선조 22년(1589)에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발생했고, 뒤이어 3년 뒤인 선조 25년(1592)엔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이런 여파가 제주에까지 밀려들어 왔던 때문일까? 선조 34년(1601)에 ‘소덕유(蘇德裕) ‧ 길운절(吉雲節) 역모 사건’이 제주에서 발생한 것이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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