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함덕리 초대 이장..함덕리 한백흥송정옥선생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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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함덕리 초대 이장..함덕리 한백흥송정옥선생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2.25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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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시기 토벌대에 붙잡혀가는 젊은이들을 위해 변호하다 목숨을 잃었다

함덕리 한백흥송정옥선생기념비 

위치 ; 조천읍 함덕리 1243-2번지(조천읍 신북로 501)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기념비

함덕리_한백흥송정옥_비석

 

함덕리_한백흥송정옥기념비

 

한백흥(韓伯興. 1897∼1948)은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한창원(韓昌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중에 함덕리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조천리 만세운동에 동조하여 만세시위에 함덕리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칙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조천항일기념관 전시관에도 조천3·1만세운동의 주역들로 이 지역 인사들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데 한백흥 선생도 이 중 한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광복 후 1947년 5월부터 함덕리 초대 이장(3구장 겸 함덕리장을 겸임)으로서 마을유지였던 송정옥 선생과 함께 4·3사건 시기에 토벌대에 붙잡혀가는 젊은이들을 위해 변호를 하다 목숨을 잃었다. 당시 토벌대는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무조건 잡아다가 총살하였다.

1948년 11월 1일 함덕국민학교에 주둔하던 9연대 토벌대는 함덕리 주민들을 마을 함덕중학교 뒤편 평사동 모래밭에 집결시키고 그 중에서 청년들 6명을 끌어내어 ‘이 사람들은 폭도들과 내통한 혐의다.

앞으로 폭도와 연락하거나 식량을 제공한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라’며 구덩이 6개를 파 놓고 처형시키려 했다.

이 때 마을 이장이었던 한백흥(韓伯興)씨와 마을 유지(1구 구장)였던 송정옥(宋禎玉)씨가 나서서 그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며 앞장서서 만류하였다.

한백흥은 ‘이 젊은 사람들은 마소를 키우는 테우리(목동)들이어서 마소를 돌보러 산에 갔다왔다 하는 것이지 폭도들이 아니다’라며 ‘목숨만 부지시켜주면 우리 마을유지들이 잘 선도해서 지도해나가겠다’고 호소했는데, 토벌대 군인들은 오히려 ‘이 자들도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양쪽에 구덩이 하나씩을 더 파게 하고는 두 분을 포함하여 청년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4·3 당시 경찰관을 지낸 함덕리 주민 김병규씨도 “이런 사실은 당시 한경면 두모지서의 순경으로 있던 내가 함덕리로 와서 동료 경찰관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고 증언하였다.(제주의소리 070404)

한백흥 선생의 손자 한하용 씨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후 우리 가족의 삶은 한 마디로 비참했습니다. 물론 우리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주민학살 이후 사람들은 마룻바닥을 뜯어내 숨어 살았고, 저희도 집 뒤에 토굴을 파서 생활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울음을 터트리면 ‘뚝, 그치라! 헌저! 제발 그치라! 우리 몬딱 죽나!’하시면서 제 입을 틀어막던 어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몸도 마음도 짓눌린 채 살았던 세월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하였다.

이 일과 관련하여 정부는 한백흥 선생을 의사자(義死者=남의 목숨을 살리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은 사람)로 판정하였고 이 판정을 계기로 2010년 1월 의사비를 세웠고 8월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한백흥 선생은 지난 2002년 11월에 정부로부터 4·3희생자로 정식 등록됐다. 이어서 2004년에는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였으나 그 이듬해인 2005년 3·1절에 맞춰 이뤄진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했고, 2015년에도 탈락했다. 보훈처로부터 자세한 사유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8년 7월 30일 국가보훈처는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한백흥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려 대통령표창에 포상하기로 결정했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은 대한민국 건국에 밑거름이 됐으며, 귀감으로서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내용의 독립유공자 선정 안내 공문을 후손인 한씨에게 발급해 알렸으며, 8월 15일을 기해 추서하였다.
《작성 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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