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참가..금악리 강봉환(姜奉煥) 지사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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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참가..금악리 강봉환(姜奉煥) 지사 생가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1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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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95년 강봉환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금악리 강봉환(姜奉煥) 지사 생가 터

위치 ; 한림읍 금악리 1287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터)

금악리_강봉환생가터

 

제주도민들은 1898년 방성칠의 난과 1901년 이재수의 난 그리고 1909년 제주의병항쟁 등에서 이미 외세의 횡포에 대항하였던 적이 있다.

일제는 1906년 제주부를 제주군으로 개편한 이후 행정을 장악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해 나갔기 때문에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시기에도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행정 장악과 경제적 수탈에 의한 피해와 횡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14년 제주도로 들어온 김연일은 법정사(法井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항상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1918년 당시 김연일(金蓮日), 정구용(鄭九龍), 장임호(張林虎) 등 7명이 입도, 법정사에 체재하고, 또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와 방동화(房東華)가 함께 하면서 한층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동년 6월경 산천단(山川壇)에서 항일 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세력들은 1918년 7월 법정사 신도들에게 거사의 뜻을 밝히고 참여를 권유해 신도는 물론 지역 농민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동년 8월 방동화는 선도교(仙道敎) 수령 박명수(朴明洙:일명 주석)를 찾아가 찬성을 얻으면서 선도교 세력을 운동에 합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선도교는 1922년에 이르러 보천교(普天敎)로 개칭된 종교로서 도내에 세칭 2만여 명이란 교도를 가진 민족 종교였다.

주도세력은 9월 강창규, 김산만, 김봉화, 양남구, 최태유, 강봉환 등이 가담해 13명으로 늘어났으며, 마을에 배포할 격문과 곤봉, 화승총 3정, 깃발을 제작하며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항일 세력은 1918년 9월 19일(음 8월 15일) 법정사에서 행하여지는 불교 의식인 우란분제(盂蘭盆祭)에 참석한 남녀 교도 30여 명에게 저항 의지를 밝혔다.

일제 축출과 국권 회복이란 양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낸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설정하여 제시했다.

9월 말 정구용은 각 구장 앞으로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10월 7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는 격문 3~4통을 만들었다. 이후 주도세력은 서로 역할을 분담해 부서를 편성했고 각 부서의 책임자를 정했다.

조직은 크게 둘로 나눠 총지휘 김연일을 중심으로 그를 보좌하는 좌대장과 우대장을 뒀고, 강창규 선봉대장을 중심으로 선봉좌익장과 선봉우익장, 이들 밑에 법정사 신도들로 구성된 선봉대를 꾸렸다. 또 참여한 지역주민을 중간에서 지휘할 수 있도록 중군대장과 후군대장을 배치해 군중 사이에서도 선봉대장 역할이 이어지도록 했다.

서귀면과 중문면의 이장(里長)은 장정을 모아 10월 7일 하원(河源) 마을에 집합하라는 통보를 내리고 ‘10월 8일 제주 성안을 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을 추방하되 이 명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군법에 처한다.’는 격문을 돌렸다.

동 10월 5일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시켜 군대 조직으로 편성한 후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선포하고 박명수를 도대장(都大將),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ㆍ우대장, 또 양남구(梁南球)를 중군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으로, 장임호를 모사(謀師)로 삼았다.

김연일은 박명수와 실행 방안을 논의하여 우선 서귀포와 중문리를 공격한 뒤 제주 성내로 진입하기로 정했다. 인원 동원 방법은, 봉기군이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각 마을 이장으로부터 민적부를 제출받기로 하였다.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새벽에 실행됐다. 김연일, 김인수(金仁秀), 김용충(金用忠) 등은 법정사에 머물고, 선봉대장 강창규와 박주석, 장임호, 정구용 등의 지휘를 받고 선봉대 34명은 기도를 올리고 법정사를 출발했다. 봉기군은 서귀포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먼저 도순(道順)리 상동에서 5명 정도를 설득시켜 봉기군에 가담시켰으며 이어 영남(瀛南)리에서 이장 강임준에게 민적부(民籍簿)를 제출하도록 하여 25명의 장정을 징발, 또 강정리에서 30여명을, 그리고 서호(西好), 호근(好近)리에서도 가담자를 확보하였다.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들을 모집했지만, 예상한 만큼 인원이 참여하지 않자 강창규는 박주석과 논의 끝에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강정리를 거쳐 도순리로 향하는 길에 선봉에 있던 강창규는 강정리와 도순리 사이 대천의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해 서귀포와 제주읍내 간 통신을 단절하기도 했다.

하원리에 이르니 봉기군은 3백 내지 4백 명에 이르렀고 중문리에 도착했을 때 인근 마을에서 참여자가 더욱 늘어 참여 인원은 약 700명에 이르렀다. 먼저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무차별 파괴하고 전소시켜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 경관 3명을 포박하여 응징하였다.

또한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했다. 또, 외래 사상의 배격이란 차원에서 길 가던 개신교 신자와 윤식명(尹植明) 목사와 전도사 원용혁(元容赫) 등을 폭행하여 서귀포 고이즈미(小泉淸身) 병원에 입원하게 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은 목포에 증원을 요구하는 한편, 도내 각처에서 모여온 진압대에 의해 서호리에서 대치하던 박명수 부대는 퇴각하고 결국 38명의 봉기 주동자 전부가 체포당하였다.

이후 오전 11시 연락을 받고 출동한 제주경찰서 서귀포주재소 기마순사대가 총격을 가하자 참여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항일운동은 막을 내렸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시켰으며 이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관련자 66명을 3차(4차)에 걸쳐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목포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일제는 법정사 항일 운동의 파급을 걱정하여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을 언도하고, 목포로 이송하여 사건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光州支法) 목포지청에서 열려 31명에 대하여서는 실형이 언도되고 강수오(강창규의 동생), 강춘근 2명은 재판 직전에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또 15명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18명은 불기소 처분을 선고하여 석방되었다.

김연일 스님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과 가출옥으로 실제 3년 2개월을 복역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31명 가운데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김두삼, 김봉화, 박주석 등 3명은 옥사했다. 또 벌금형을 선고받은 15명은 벌금 30원을 납부하지 못해 30일간 노역장에서 노동할 수밖에 없었다.

강봉환(1867∼1961) 선생은 본관은 진주, 姜元先의 아들로 금악리에서 출생하였다. 선도교 신자로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가했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1995년 강봉환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개인 묘지에 있었는데 2010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애국지사 제4묘역-297)으로 이장하였다.(보훈처 공훈록, 제주인물대사전, 제주新보 190127)
《작성 1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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