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5)-금남(錦南) 최부(崔溥)의 35절(絶)(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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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5)-금남(錦南) 최부(崔溥)의 35절(絶)(1487)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3.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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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최근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한시로 읽는 제주 역사는 고려-조선시대 한시 중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제주관련 한시들을 모아 해석한 내용이다. 특히 각주내용을 따로 수록, 한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편집자주)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5)

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5.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탐라시(耽羅詩> 35절(絶)(1487)

 

【원문(原文)】

<그림 1> 김상헌(金尙憲) 《남사록(南槎錄)》에 실린 최부(崔溥)의 <탐라시(耽羅詩)> 35절(1)
* 자료출처 : 《제주사자료총서(濟州史資料叢書)》(Ⅰ)(제주도, 1998), 305쪽.

 

【판독(判讀)】

〇溥嘗爲弘文館副校理時 承 命校讎東國

輿地勝覽 幾閱歲講究 我海東諸 道州府郡

縣之地之跡 已瞭然心目 惟濟州一島 邈在

海中距 京都數千里 撰以所聞脫漏尤甚 思

欲一致 身於其地以質正焉 歲丁未九月奉

命 以採御乘監牧場 括隱丁辨良賤 刷流移

人口 來使于此 是年仲冬十有二日 與新牧

伯許公熙 同舟于館頭梁 遇便風暫 眼間到

泊朝天浦 邑人歎其舟行甚駛也 本州諸官

偕迎于海口 又州人若干 皆巨族有物望者

 

【해석(解釋)】 서문(序文) (1)

〇 최부(崔溥)가 일찍이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였을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교수(校讎)하라는 어명을 받들어 거의 한 해를 보내는 기간 동안 연구하며 대책을 세워 왔다. 그랬던 터라 우리 해동(海東) 지역의 여러 도(道) ·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의 지리적 자취는 이미 마음의 눈으로도 꿰뚫고 있었다.

오직 제주(濟州)란 한 섬만은 멀리 바다 가운데 있어 거리상으로도 경도(京都)에서 수천 리나 되기에 들은 바대로 찬술(撰述)하려고 하니 빠뜨린 부분이 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소 그 땅에 찾아가 묻고서 바로잡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드디어 정미년(丁未年, 1487) 9월에 어명을 받들기를, 어승마(御乘馬)를 고르는 일 · 목장을 감독하는 일 · 숨은 장정을 찾아내는 일 · 양민과 천민을 분별해내는 일 · 떠돌이 백성을 없애는 일 등을 처리하고자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 해 중동(仲冬, 음력 11월) 12일에 새로 부임하는 목사 허희(許熙) 공(公)과 함께 (해남의) 관두량(館頭梁) 포구에서 같은 배에 올라탔는데, 바람을 편하게 받아 잠깐 사이에 조천포(朝天浦)에 이르러 정박하게 되었다.

이곳 마을 사람들로서는 뱃길이 그처럼 빠른 데 대해 모두 감탄해마지 않았다. 본주(本州)의 관리들 여럿이 함께 바다 포구로 마중 나와 맞아주었다. 게다가 제주 사람 중 몇몇은 거족(巨族)이면서 물망(物望)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

 

【원문(原文)】

<그림 2> 김상헌(金尙憲) 《남사록(南槎錄)》에 실린 최부(崔溥)의 <탐라시(耽羅詩)> 35절(2)
* 자료출처 : 《제주사자료총서(濟州史資料叢書)》(Ⅰ)(제주도, 1998), 306~307쪽.

 

【판독(判讀)】

以次來謁禮莫愆 因謁聖于鄕校 校生百餘

輩 亦以禮謁之 衣冠文物粲然可觀不可以

海外 少之退舍所館治事之暇 已前諸人等

或晨昏往來 以破幽寂居七八日 又同許牧

伯巡各縣 諸官亦皆具禮以迎溥 於是周觀

山川形勝之襟帶 人物風俗之繁華 土産關

防橋梁館宇祠社古蹟靡不詳悉 遂欲效州

藏舊乘 則爲官府失火 所焚 溥竊念 此地舊

爲國封星主王子以來 千有餘載 已往沿

遺迹 泯沒無聞 良可恨已因窮搜野史 質諸

父老兼採所覩聞 斷以己意表爲此編製 耽

羅詩三十五絶 合爲一篇 附於後令州人繕

寫成帙藏之本邑 以爲後日文獻所徵 成化

二十三年 丁未十二月日 敬差官崔溥 書

渤海之南天接水 鰌潮鼉浪無涯涘 耽羅國在

渺茫中 一點彈丸九百里 中有靑螺駕六鰲 巨

靈擘破勢周遭 撑天圓嶠無頭處 翠壁一里千

尺高 誰從壁頂鑿靈沼 㗸蛤幾廻貢貢鳥 折峙

山房果若然 奇觀問却知多少 蒼松綠竹紫檀

香 赤栗乳柑橘柚黃 白雪丈餘紅錦樣 四時留

 

【해석(解釋)】 서문(序文) (2)

 

차례로 나와 배알(拜謁)함이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어서 향교(鄕校)를 찾아가 성인(聖人)에게 예를 올렸는데, 마침 그곳의 교생(校生) 백여 명도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을 갖추어 예알(禮謁)하였다. 그 광경의 찬연함이란 바다 밖에서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볼만 하였다.

사(舍) · 소(所) · 관(館)에서 처리할 일들을 마치고 물러나 있는 여가에 이미 앞서 만났던 사람들 여럿이 간혹 아침저녁으로 찾아왔기에 조용하고 적적하지만은 않았다. 7, 8일쯤 지내다가 허(許) 목사와 함께 각 현(縣)을 순시했는데 그곳의 관리들 여럿 또한 예를 갖춰 맞아주었다.

최부(崔溥)는, 이리하여 두루 산천(山川)과 형승(形勝)의 험요한 지세와 인물(人物) · 풍속(風俗)의 번화함, 토산(土産) · 관방(關防) · 교량(橋梁) · 관우(館宇) · 사사(祠祀) · 고적(古蹟) 등을 두루 둘러보면서 자세히 알아보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이번에는 주(州)에 보관된 옛 사서(史書)를 찾아내어 그 기록을 본받고자 하였더니, 이전에 관부(官府)가 실화(失火)의 피해로 모두 불타서 없어졌다고 했다.

최부(崔溥)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땅은 예로부터 어엿한 나라로서 성주(星主) · 왕자(王子)를 받들어 온 지가 천여 년이나 되건만, 지난날의 연혁(沿革)과 유적(遺蹟)이 망실되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한탄을 자아내게 했다.

궁색한 처지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야사(野史)나마 찾아보고, 부로(父老)들 여럿을 찾아가 질문을 하였다. 겸하여 보고 들은 바를 채록하였고, 자기 뜻밖의 것은 재단(裁斷)하면서 이런 글을 엮게 되었으니, <탐라시(耽羅詩) 35절(絶)>을 지어서 모아 1편(篇)을 만들어 뒤에 부쳤다.

주인(州人)을 시켜 잘 베껴 쓰도록 하니 한 질(帙)을 이뤘고, 이를 본읍(本邑)에 보관토록 하니 후일에 징험(徵驗)할 수 있는 문헌이 될 것이다.

성화(成化) 23년(1487) 정미(丁未) 12월 아무 일에, 경차관(敬差官) 최부(崔溥)가 쓰다.

 

【해설(解說)】

최부(崔溥)가 쓴 <탐라시(耽羅詩) 35절(絶)> 서문(序文)의 성격을 띤 이 글은, 이 시를 세상에 처음 소개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만 실려 있을 뿐, 다른 곳에선 찾아보긴 힘들다.

<그림 (3)> 최부에게 내린 교지(敎旨) - 문과 중시 을과 제1인 입격자(1486. 11. )

 

이 글을 통해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이 시의 작자인 최부는 제주로 내려오기 이전 홍문관 부교리로 재직하면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교수(校讎)하는 일을 맡아보았기에 전국의 지리 풍속에 대해 사전 예비지식이 이미 풍부히 갖춰진 상태였다.

둘째로 경차관(敬差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제주에서의 해결 사항이란, 어승마(御乘馬)를 고르는 일 · 목장을 감독하는 일 · 숨은 장정을 찾아내는 일 · 양민과 천민을 분별해내는 일 · 떠돌이 백성을 없애는 일 등을 처리함이었다.

셋째로 그 당시 새로 부임한 제주 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제주 전역을 순력(巡歷)하고, 제주 부로(父老)들과의 면담을 통해 듣고 깨달은 바를 취사선택하면서 제주의 산천(山川)과 형승(形勝)의 험요한 지세와 인물(人物) · 풍속(風俗)의 번화함, 토산(土産) · 관방(關防) · 교량(橋梁) · 관우(館宇) · 사사(祠祀) · 고적(古蹟) 등의 사항을 정리해서 이를 시문화(詩文化)한 작품인 <탐라시 35절>을 완성했다.

넷째로 완성된 <탐라시 35절>의 원문을 제주목 서리에게 베끼도록 해서 그 사본 1본을 제주목에 보관토록 조처했다.

이는 이후 1백여 년이 지난 뒤 제주 안무어사(按撫御史)로 내려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남사록(南槎錄)》에 실어 소개함으로써 이 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추정컨대 당시 최부가 작성한 원문 <탐라시 35절>은 그가 표류하는 동안 망실(亡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의 문집(文集)인 《금남집(錦南集)》에 이 <탐라시 35절>이 게재되지 않았던 사유가 아닐까 하고 추정해본다.

 

【해석(解釋)】 (1)

渤海之南天接水(발해지남천접수) 발해의 남쪽 지역, 하늘은 물과 맞닿았고

鰌潮鼉浪無涯涘(추조타랑무애사) 큰 조수 격렬한 파도, 가없이 넓기만 하구나.

耽羅國在渺茫中(탐라국재묘망중) 탐라(耽羅)라는 나라, 아득히 먼 곳에 있으니

一點彈丸九百里(일점탄환구백리) 한 점 탄환같이 작은 섬, 9백 리나 떨어졌네.

※ 운자 : 상성(上聲) ‘紙(지)’운 - 水, 涘, 里

 

【해설(解說)】

제주의 지형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한본토(韓本土)’의 남쪽이라고도 할 법도 한데 ‘발해지남(渤海之南)’이란 표현을 써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고 있는 느낌이다.

참고로 ‘오신산(五神山)’의 전설을 이야기한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에 보면, ‘발해지동(渤海之東)’이란 표현으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곧, “발해의 동쪽으로 몇억 만 리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 큰 구렁이 있다.[渤海之東 不知其億萬里 有大壑焉]”란 구절이 그렇다.

그리고 제주도(濟州島)를 ‘한 점 탄환[一點彈丸]’과도 같은 작은 섬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 <탐라(耽羅)>란 시에서 탐라(耽羅)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점[蒼蒼一點]’이라고 표현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구백리(九百里)’란 표현은 절로 궁금증이 생기게 하는 대목이다. 육지 본토에서 제주까지 해상 뱃길을 거리로 환산해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혹은 제주도 섬 자체의 크기를 두고서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보면 제주 섬의 둘레가 458리이며, 아울러 제주에서 북쪽으로 해남 관두량(舘頭梁)까지의 바닷길의 거리는 970리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백리’는 제주와 육지와의 바닷길의 거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봄이 이치상 옳을 듯하다. 최부는 마침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허희(許熙)와 함께 해남 관두량에서 배를 타고서 제주를 향해 출발했음을 앞의 서두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한편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탐라지(耽羅志)》를 보면, 그 책에 최부의 <탐라시 35절>을 소개하면서 이 부분을 ‘일점탄환육백리(一點彈丸六百里)’라고 표현을 달리하고 있다.

결국 3백리를 줄여서 언급한 셈인데 이는 또 어찌 된 영문일까? 다만 최부가 경차관(敬差官)의 임무 수행 차 제주로 향했던 때가 성종 18년(1487)이고, 이원진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던 때가 효종 2년(1651)이고 보면 서로 164년의 격차가 있다.

그렇다면 세월의 변천에 따라 제주로 오는 육지에서의 바닷길도 변화를 겪은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언뜻 또 달리 생각해보면, 제주 목사 이원진의 생각에 ‘한 점 탄환같이 작은 섬’이라고 한다면 제주 섬의 크기가 섬 한 바퀴를 돌아봐야 육백리(六百里)도 안 될 것이라고 본 게 아닐까 하는 점도 예상해볼 수 있다. 앞서 이형상이 《남환박물》에서 밝힌 제주 섬의 둘레는 458리라고 했기에 오백리(五百里)가 채 안 된다.

<그림 (4)> 제주 바닷길 ‘수로칠백리(水路七百里)’ *출처 : 《호서호남영남도》 부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발행된 ‘남해안 바닷길이 그려진 지도’에 보면 제주로 오는 바닷길이 ‘수로칠백리(水路七百里)’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게 어디서부터 출발점을 잡아 그렇게 계산한 것인지는 명확지 않다.

 

【해석(解釋)】 (2)

中有靑螺駕六鰲(중유청라가육오) 한가운데 푸른 산이 여섯 자라 등에 올라타고

巨靈擘破勢周遭(거령벽파세주조) 거령 손바닥 써 깨뜨린 형세 널리 퍼져있네.

撑天圓嶠無頭處(탱천원교무두처) 하늘 떠받친 원교산, 머리 없는 봉우리에

翠壁一里千尺高(취벽일리천척고) 푸른 벽 일리나 되는 천길 높은 낭떠러지라.

※ 운자 : 평성(平聲) ‘豪(호)’운 - 鰲, 遭, 高

 

【해설(解說)】

‘자라 등에 올라탄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고사가 여기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작자는 영주산(瀛洲山)을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에 오신산(五神山) 중의 하나인 원교산(圓嶠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원교산 정상이 둥글게 파인 채로 못이 형성되어 있음이 한라산에 백록담이 있음과 부합되기 때문에 그걸 대비시켜 강조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한편 ‘거령(巨靈)이 손바닥을 써서 깨트린 형세’란 표현의 이 구절은 동한(東漢)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 중 “거령(巨靈) 비희(贔屭)가 있는 힘을 다 써서 높은 곳은 손바닥으로 치고, 먼 곳은 발로 밟아서 둘로 나눴다.

[巨靈贔屭高掌遠蹠]”라는 구절을 참조해 인용한 듯하다. 여기서 거령은 황하(黃河)의 신으로서 전설에 의하면 화산(華山)이 황하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거령이 불끈 힘을 써서 화산을 둘로 쪼개어 그 사이로 황하가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5)> 윤제홍의 ‘한라산’ (개인소장)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1764~?)이 그린 한라산 그림에서 백록담 내부의 형상을 여럿의 절벽들이 연이어진 형태로 그려냄이 ‘翠壁一里千尺高(취벽일리천척고)’의 느낌을 잘 대변해내는 듯하다.

 

【해석(解釋)】 (3)

誰從壁頂鑿靈沼(수종벽정착영소) 그 누가 암벽 정상에 영험한 못 파두어서

㗸蛤幾廻貢貢鳥(함합기회공공조) 공공새 대합조개 물어 몇 번이나 날랐던고.

折峙山房果若然(절치산방과약연) 봉우리 잘라 산방산 된 게 과연 그대로라면

奇觀問却知多少(기관문각지다소) 기한 경관 물음에 도리어 아는 이 몇몇일까.

※ 운자 : 상성(上聲) ‘篠(소)’운 - 沼, 鳥, 少

 

【해설(解說)】

산방산(山房山)이 생기게 된 요인이, “한라산의 한 봉우리가 쓰러져서 여기에 서 있다.[漢拏山之一峯 頹而峙于此]”라는 세속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개함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대정현(大靜縣) ‧ 산천(山川)>조에도 보인다. 여기에서 작자는 한라산 백록담의 신비한 면을 짐짓 드러내려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림 (6)> 산방산의 위용(부분 확대) * 출처 《제주 100년》(제주도, 1996)

 

【해석(解釋)】 (4)

 

蒼松綠竹紫檀香(창송녹죽자단향) 울창한 솔, 푸른 대, 구상나무 향기롭고

赤栗乳柑橘柚黃(적율유감귤유황) 적율 · 유감 · 귤유 과일 누렇게 익었네.

白雪丈餘紅錦樣(백설장여홍금양) 한 길 남짓 쌓인 백설 붉은 비단 펼쳐놓은 듯

四時留(得靑春光)(사시유득청춘광) 사계절 내내 넘쳐남이 푸른 봄빛이구려!

※ 운자 : 평성(平聲) ‘陽(양)’운 - 香, 黃, 光

 

【해설(解說)】

귤밭 너머로 한라산에 쌓인 눈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림 (7)> 산남의 귤밭에서 본 한라산(*사진 제공 – 오상철)

 

(연재 계속 됩니다) 

 

 

필자소개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태생

-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독학(獨學)

외조부에게서 《천자문(千字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기초 한문 학습

 

주요 논문 및 저서

(1) 논문 : <공자(孔子)의 음악사상>, <일본에 건너간 탐라의 음악 - 도라악(度羅樂) 연구>, <한국오페라 ‘춘향전(春香傳)’에 관한 연구>, <동굴의 자연음향과 음악적 활용 가치>, <15세기 제주 유배인 홍유손(洪裕孫) 연구>, <제주 오현(五賢)의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 등

(2) 단행본 저술 : 《엔리코 카루소》(1996), 《악(樂) ‧ 관(觀) ‧ 심(深)》(2003), 《방선문(訪仙門)》(2004), 《취병담(翠屛潭)》(2006),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2008), 《우도가(牛島歌)》(2010),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2011), 《귤록(橘錄)》(2016), 《청용만고(聽舂漫稿)》(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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