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도내 유일 생존 독립유공자..시흥리 강태선 지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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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도내 유일 생존 독립유공자..시흥리 강태선 지사 생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4.11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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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시흥리 강태선 지사 생가 
 

위치 ;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1038번지(시흥상동로68번길10)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항일투쟁가 생가)

강태선(독립운동)
시흥리_강태선 생가


강태선(1924.06.15.∼) 지사는 본관이 진주이며, 성산면 시흥리 1060번지에서 강경환(姜京煥)의 아들로 태어나 1939년 3월 성산서공립국민학교(現동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제주에서는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부친이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도 할 겸 간 것이다.

1941년 오사카 포시시(布施市) 소판(小坂)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 2년을 졸업하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독학으로 진학 공부를 하였으나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자 사상에 관한 문헌을 자주 읽게 되어 그에 따라 민족의식이 점차 첨예화하였다.

전문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강 지사는 주불해(周佛海)가 지은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민족 ․민권 ․민생) 사상서적을 탐독하고, 쓰루미 요스케라는 일본인이 쓴 ‘식민정책론’이라는 책을 읽고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일본의 대조선교육정책은 조선인을 눈뜨게 해서는 안 된다, 경제정책은 조선에는 대기업을 만들면 안 된다, 경제적으로 독립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일제의 한국인 차별 대우에 분노해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됐다.

1942년 8월경 독립운동 추진을 결심하고, 친지인 지원호(池源鎬)·심종보(沈宗輔) 등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해 협의하면서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또한 징병제는 독립운동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제가 강요하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은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것이므로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들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서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력에 의한 독립봉기의 시기 등을 협의하는 한편 동지규합에 힘쓰다가 1943년 6월 3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아스마경찰서에 잡혀갔는데 인적사항을 물어보고는 1주일 동안은 아무 소식도 없었다. 조사관이 경찰서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시청에서 왔다. 처음에는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또 온몸을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찼다. 온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었다. 주전자에 담긴 물을 코에 부어넣는 물고문도 당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수감되었다.”

1944년 8월 25일 오사카지방재판소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강 지사에게 2년6월의 형을 선고했다. 강 지사는 광복이 되기 전까지 오사카 사카이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조선 학도병을 모집했어 조선 청년들이여! 천황과 조국 일본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자… 도대체 왜 우리가 일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 조선의 젊은이들이 왜 전장에 끌려 갔겠나? 조국이 없기 때문이야.

일제에 합병이 되서 나라도 민족도 없었어. 나라 없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 몰라. 암울한 세상이었지, 희망도 없었고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되네.

스무살 때야, 특고형사(特高刑事)들에게 얻어터지면서 석달간 취조를 받았지. 나라와 민족이 없다는 서글픔이 얼마나 큰 줄 알아. 어떻게 살아서 나왔는지….

공부하러 왔다가 젊은 나이에 형무소에 갇히게 됐으니 서글펐지만 내가 한 일은 옳고, 정당했다고 생각했어. 조선인 징병·징용을 더 막았어야 됐는데….

미군 폭격기들은 사카이 형무소만 폭격하지 않았어. 미군 포로들이 수감됐기 때문이야. 미군 포로들은 폭격기가 지나 갈 때마다 조국이 있다는 사실에 만세를 불었어. 나중엔 폭격이 있을 때마다 형무소측은 미군 포로들을 독방이 아닌 지하 감방에 몰아넣었지.

일본이 패망하자 형무소 소장이 나를 불렀어.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과 조선이 합병이 됐기 때문에 법 아닌 법을 어겨서 고생을 했습니다. 제발 일본인들에게 보복은 말아 주십시오.라며 용서를 비는 소장을 때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

강지사는 광복 후 1946년 가을 제주로 돌아왔다. 1982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도내에서 유일하게 생존(2022년 99세)해 있는 독립유공자이다. 자택에 '국가유공자 명패'가 달려 있다.(제주항일인사실기, 제주일보 2007-03-01, 한라일보 2019-02-28, 제비강씨 카페, 제주와 인물)

부인의 몸이 불편하여 화북동에 있는 아들네 집에서 거주(190908 둘째아들과 대화)하다가 다시 시흥리 자택에 거주하고 있다.
《작성 2019-09-11, 보완 2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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