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정절지키려 죽은..태흥2리 김창언처오씨열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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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정절지키려 죽은..태흥2리 김창언처오씨열녀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20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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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순조12년(1812) 태흥리 937번지에 세워져


태흥2리 김창언처오씨열녀비

 
태흥리 오씨열녀비 烈女碑 (위 ; 옛 사진, 아래 ; 현재 모습)
위치 ; 남원읍 태흥2리 937번지. 태흥초등학교 서쪽 3거리에서 태수로를 따라 의귀로 가는 길 400여m 지점 길가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1812)
유형 ; 열녀비
비문 ; 烈女吳氏之閭(舊), 烈婦軍威吳氏碑閭(新)

 

 

 

약 200여년전 벌포리(속칭 '펄개'. 1402년 벌포리→1897년 보한리→1902년 태흥리 ; 제민일보 1995년 5월 11일) 김창언의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다.

김창언은 오원번 씨의 딸과 혼인하여 첫아들이 태어난 뒤 한 달쯤 되었을 때 말을 타다가 떨어져 아내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부인 오씨는 남편을 장사지내고 난 뒤 아들을 시누이에게 맡기면서 잘 키워 달라고 당부한 뒤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집 가까이에 있는 냇가 깊은 물(속칭 흑수, 검은 물)에 빠져 세상을 떴다. 그 아들은 김천겸으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태흥리에 살고 있다.

제주향교지에는 오씨에 대하여〈본관은 군위이고 원번(元磻)의 딸이다. 성품이 정숙하여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한 달이 못 되어 문득 남편이 죽었다.

오씨는 너무 슬퍼서 실성(失性)하였는데 성복(成服)하는 날 몸을 바다에 던져 따라 죽었다. 사림(士林)에서 열녀로 천거하니 순조 12년(1812) 정표되었다.

비는 남원읍 태흥리에 남아 있다.〉라고 정리되어 있다.(濟州鄕校誌 670쪽) 죽었다고 하는 곳이 마을에서 전해오는 바와 다르다.

이 비석에 대한 자료 중 처음 비석이 세워진 곳에 대해서는 두 자료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1)임금의 명에 의하여 의귀리에 열녀비가 세워졌고, 일제시대에 태흥리 무두동산에 옮겨졌었다가 수년전 지금의 위치인 태흥교회 옆으로 옮겨졌다.(서귀포교육청, 설촌 유래. 128-130쪽)

(2)비석은 순조12년(1812)에 태흥리 937번지에 세워졌었다.

비의 높이는 66cm, 전면 길이 32cm, 측면 길이 10cm이며, 높이 80cm, 전면 길이 72cm, 측면 길이 53cm의 석실 안에 세워져 있다.(남제주의 문화유적 118쪽) (2)번 기록이 전문가들에 의한 자료이므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검은물은 깊이가 7-8m 정도로 매우 깨끗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음용수로 이용하였었으나 사라호 태풍 때 큰 돌들이 굴러 떨어지면서 창이 터져 버려 지금은 물이 말랐다.

다만, 물팡으로 썼던 자연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 생활 모습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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