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마을 평안..봉성리 구머리당(묘일당,할망당,본향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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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마을 평안..봉성리 구머리당(묘일당,할망당,본향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6.2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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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리에는 당이 이곳 한 군데 남았는데 매인심방 없어서 관리 안돼


봉성리 구머리당(묘일당,할망당,본향당)

 


위치 ; 애월읍 봉성리 3683번지. 구몰동 서쪽 망대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되는 곳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민속신앙
시대 ; 조선

 

▲ 봉성리_본향당

▲ 봉성리_구머리당

봉성리는 얼마 전까지는 어도리라고 불렀었다. 이름이 좋지 않아 마을에 흉화가 계속된다 하여 이름을 바꾸었는데 ‘어도’라는 이름 전에는 ‘도노미’, 한자로 표기하면 ‘道內山里’였다.


할망당이라고 부르는 이 당은 설촌 중반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녀자들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맨 먼저 수확한 곡식을 마련하여 풍년농사와 집안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하여 찾아간다.

태풍 때 거목 팽나무는 부러지고 그 후 남은 부분이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를 믿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매인심방이 대가 끊기고 당을 찾는 부녀자들의 수도 많이 줄어들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당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당신앙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애월읍지 248쪽)

1959년생인 마을 주민의 말을 들어 보니 자기 자신이 당의 팽나무에 올라가 ‘폭을 타 먹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태풍은 빌리호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에는 단궐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걸려 있는 지전물색이 매우 오래 되어 색이 바랬고, 제단도 형태로 보아 제단이라고 부를 정도가 못 되기 때문이다.

크기가 45cm×45cm, 25cm×45cm 정도의 평평한 자연석 몇 개를 한 줄로 늘어놓아 그 앞에다 양초를 세우는 정도이다. 제단 앞에는 팽나무가 아니라 멀구슬나무가 가까이 있고 팽나무는 조금 더 떨어져 있다.

모시는 신 이름은 ‘문씨영감’과 ‘오씨할망’이다.


본풀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일(卯日)당한집님은 바름 우은 문씨영감 바름 알은 오씨할망 도로(다시) 모일한집 신감상(神監床) 모일한집 호적문세 차지하고 저싱엔 장적차지하고 인물도성책을 차지하고 수다많은 자손들 붉은 양지 지면하는 모일한집님」(봉성본향① ‘모일당’)


「문씨영감 오씨한집 폭낭알로 좌정하영 자손들 그늘룹네다」(봉성본향② ‘지세못동네당’)


「할로영주산 신령있는 외 나무 외 장수 앞인 선배 뒤엔 후배 일만관속 거느령 내려왕 앞인 삼천백매또 뒤옌 초기연발 거느리던 송씨할망 자손들 일년에 한 번씩 제를 받기 원하고 지전물레물색 받아오던 토지지관」(봉성본향③ ‘구머리당’)(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 595~596쪽)


이 마을에 맨 처음 정착한 문씨 할아버지와 송씨 할머니 부부가 생활하던 중 송씨할망이 돼지고기를 너무 먹고 싶어했는데 문씨할으방이 돼지고기를 싫어해서 못 먹게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을 보고 잡으러 가는 돼지인 줄 알고 뒤따라갔는데 돼지 임자가 연유를 묻자 고기를 조금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 돼지는 잡으러 가는 돼지가 아니고 사또께 진상물(進上物)로 간다고 하며 돼지털 몇 개를 뽑아 송씨 부인을 주면서 이것을 불에 그슬려 코에 대면 궤기를 먹은 기분이나 같다고 했다.

솔직한 송씨 부인은 집에 가지고 와서 시킨 대로 했는데 조금도 기분이 달라지지 않았다. 뒤늦게 들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이 사유(事由)를 고백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매우 화를 내며 양반집 아낙네가 그런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다며 더러워서 같이 살 수 없어 떠나야겠다고 하자 송씨 부인은 남편에게 매달리며 자기 잘못된 행동의 용서를 빌었다.

그래도 남편은 듣지 않고 뿌리쳐 나갔다. 송씨 부인은 남편을 향하여 가는 곳이나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남편은 한라산 백록담으로 간다고 하며 집을 떠났다.

이것이 영원한 부부의 생이별이었다. 그 후 송씨는 날마다 한라산 쪽을 바라보며 후회와 생식으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송씨부인은 한 맺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 마을에 흉사가 겹치자 송씨 부인 혼백을 본향신(本鄕神)으로 모시자고 하여 할망당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음력 정월 15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굿을 벌였는데 굿의 목적은 송씨 부인이 생전에 한이 맺히도록 그리던 남편 문씨 영감의 혼(魂)을 불러들여 영혼상봉을 이루게 하는 굿이다.

그러면 온 마을이 평안해지고 전염병도 마을을 피해갔다고 한다. 당굿 최대행사로 읍민(邑民)은 물론 이웃 사람들까지 모여와서 노래와 춤, 씨름, 연날리기 등 온종일 즐겼다.

이제는 해마다 정월 십오일날 굿 대신 당제로 지내고 있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주민들은 정월 포제가 끝난 뒤 택일하여 다닌다고 한다.


제물은 특별한 금기는 없다. 곤메 3기, 큰메 2기, 작은 사발메 1개, 돌레떡, 옥돔 2마리 또는 보통 생선, 돼지고기(적 또는 토막, 송씨할망을 위한 것), 껍질 벗긴 닭 3~4마리(문씨할망을 위한 것), 과실 3~5종(사과, 배, 유자, 귤, 감, 대추), 제주(燒酒), 香, 쌀(과거에는 집에서 재배하는 곡식을 한 줌씩 모두 모아 당 주변에 뿌렸는데 이는 곡식 씨를 할망당에 선봉(先奉)하여 곡식이 잘 여물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생쌀을 가져가서 뿌리기도 한다.)


봉성리에는 당이 이곳 한 군데 남아 있는데 매인심방이 없어서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 다른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온 사람들은 이 당에 다니지 않고 원래 마을의 당에 다닌다고 한다.

송씨할망과 문씨하르방을 모시는데 다른 당과 다르게 특이한 점은 송씨할망을 위해 돼지고기를, 문씨하르방을 위해 닭고기를 올리고 삶은계란 3개와 생계란 3개를 당에 던져 깨뜨리는데 저승차사가 술과 생계란을 좋아한다 하여 차사에게 목숨 세 개를 바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당에 잘못 걸리면 허물도 나고 미치광이도 난다고 하니 매우 조심한다고 한다. 명실은 걸기도 하고 안 걸기도 하지만 지전은 반드시 올린다. 궤묻음을 하고 남은 제물은 싸 가지고 돌아간다.


당제일에 맞추지 않고 개인적인 비념을 할 때는 집안 일이나 자식 일 등을 기원한다.

즉, 집안에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긴다거나 복잡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아이들이 이유없이 아프거나 자식들의 시험이나 군입대 등의 일이 있을 때 찾는 것이다.(양성희 안내 자료, 1997 애월읍지)
《작성 041029, 보완 121115, 1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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