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선비 출세 기원..성읍1리 정의향교 (旌義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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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선비 출세 기원..성읍1리 정의향교 (旌義鄕校)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8.04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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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5성(五聖) 22현의 위패 봉안


성읍1리 정의향교 (旌義鄕校)


위치 ; 표선면 성읍리 820번지 외 4필지
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유형문화재 제5호
시대 ; 조선
유형 ; 교육 유적

 

▲ 성읍리_정의향교_전패

▲ 성읍리_정의향교_대성전(신).

 

정의향교는 조선 시대의 지방 관립 학교로,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 따르면 건립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종2년(1420) 성산읍 고성리(古城里)에 처음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종5년(1423) 정의현성(縣城)을 고성리에서 진사리(晉舍里, 현 성읍리]로 옮기면서 서쪽 성 안에 세워졌고, 영조14년(1738) 현감 나억령이 명륜당과 재실(齋室)을 세웠다.

순조9년(1809) 현감 여철영(呂哲永)에 의해 다시 화원동(化源洞)으로 옮겨졌다.

고명학(高鳴鶴)의 『이건기』에 따르면, 당시 정의 향교는 관아는 물론, 민가와 너무 가까워 폐해가 있었고, 더구나 대성전의 위치도 잘못되어 있었다.

화원동으로의 이건은 현감 여철영이 불의의 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후임인 현감 노상희(盧尙熙)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후 헌종15년(1849) 장인식(張寅植) 목사의 계청(啓請)으로 다시 성안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제주향교에 강제통합됐던 정의향교는 지역 유림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32년 복교되었고, 광복 후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여 1951년 길성운 지사 재임시 중수되었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1957년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중수되고 있다.


정의향교의 현존 시설로는 대지 1,003평(3,316㎡)에 5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동재(東齋)·서재(西齋)·삼문(三門) 수선당, 수호사 등이 있다.

대성전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 좌측 아래에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수호사가, 아래쪽에는 수선당이 있다. 동·서재는 대성전 아래 쪽에 있다.


정의향교 대성전의 구조를 보면 평면은 5간에 전후에 퇴(退)가 있다. 구조는 7량(樑)이고 기둥은 민흘림으로 직경 38cm로 굵은 편이다. 지붕은 팔작이며 곡선은 그간 수차의 이건과 보수로 인하여 원형이 다소 변형되었다.

2000년 11월에는 대성전 중수공사중 대성전 밑바닥에 깔려 있던 35평 규모의 박석이 발견됐다. 박석은 넓적한 돌을 말하는 것으로 헌종15년(1849) 설치되었던 것이 1967년 보수공사 과정에서 묻힌 것으로 보고 있으며 박석 원형을 살려 복원하였다.


대성전에는 모두 5성(五聖) 22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공자를 주향으로 좌우에는 4성위(四聖位)[안자·증자·자사·맹자]가, 동·서벽에는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정호·정이·주희]과 동국(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돈이와 정이 양위(兩位)는 1982년에 봉안한 것이며, 대정향교와 마찬가지로 소설위(小設位)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는데 주로 표선·성산·남원의 유림들이 참여하고 있다.


명륜당은 유학을 강의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강당이며 지금의 학교 교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명륜당은 영조14년(1738) 창건한 바 평면은 정면 5간이며 전후좌우에 퇴(退)가 있다.

전퇴(前退)는 앞으로 개방되어 토방(土房)으로 사용되고, 중앙 3간은 바닥이 마루로 되어 청방이며, 좌우익은 온돌방과 고방으로 쓰고 있다.

주춧돌(礎石)은 원뿔대형이며 기둥은 민흘림으로 되었고 지붕은 팔작이다. 최근의 많은 보수로 용마루와 추녀 끝이 올라가는 육지풍을 띤 건물로 변형되었다.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숙식하던 곳이다.


《제주의 문화재》에는 정의향교가 태종8년(1408) 홍로현에 건립되었던 것을 1416년 정의현청 소재지였던 성산읍 고성리에 옮겨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지금도 서귀포시 서홍동 마을 중심 지역 남쪽에 ‘향교가름’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용담동 노인회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예전에는 향교 터가 좋아야 출세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향교 자리는 어느 자리보다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제주향교도 향교 터를 여러 번 옮기면서 선비를 출세시키려 했었다는 것이다.

특히 향교 터가 어디에 자리잡았는지에 따라 배출되는 관직들도 달랐다는데, 제주향교의 경우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이어서 무과 급제자들이 많았고, 정의현(현 서귀포시 성읍)에 있는 정의향교는 문장투필형(文章投筆形)이어서 문과 급제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대정향교는 향교터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어서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이 가장 많았음에도 과거 급제자는 전혀 내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에 풍수에 맞게 부자로 사는 선비들은 많았다고 한다.

대성전을 출입할 때에는 오른쪽 작은 계단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고, 왼쪽 작은 문으로 나와서 왼쪽 작은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이 바른 예의이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고,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으며,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정의향교 전패


정의향교에는 현재 전패가 보관되어 있다.(사진 위) 원래 전패는 각고을의 객사 안에 모셨던 〈殿〉이란 글씨가 씌어 있는 나무 패인데 이는 '大殿'(대전) 곧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로서, 지방관들이나 여행중인 관리가 초하루 보름에 전패를 향하여 예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여 서울에 봉안되어 있던 '궐패'를 모방하여 지방에서 왕권의 지배를 표방하던 의물(儀物)이었다.


그런 것이 정의현 객사가 헐리는 과정에서 일제 관헌들은 전패마저도 땅을 파서 묻으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정의고을 유생들의 항거가 만만치 않았다.

신풍리 출신 정의향교 재장(齋長) 오방열(吳邦烈)은 성안의 유생들을 모아 말하기를 ‘나라가 망했기로 이런 치욕을 당할 수 있는가? 이 일을 보고만 있는 것은 오적신(五賊臣)이 매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하고 전패를 수호하는 것도 나라를 지키는 한 방법이다라고 역설하였다.

향교와 향청의 임원들이 적극 반대하고 또 이에 동조하는 현민들이 많았으므로 민심이 흉흉할 듯하여 그만두었다. 다음해에 상부의 명령이 엄하다 하여 사령과 신식군졸이 객사를 헐려 하여 고유제를 지냈다. 이를 본 오방열은 서통유사(書筒有司) 김신황(金愼璜)을 시켜 4면 유생 100여명이 모이도록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관에서도 어찌할 수 없어 다시 중지하였다. 또 다음해 정월에는 비밀리에 객사를 헐어 버리려 하였다. 이 계획을 미리 알아챈 오방렬은 김희윤, 김신나 등 성안의 유생 몇 사람을 모아 야음을 타서 전패를 의사묘(오흥태 사당)로 임시로 옮겨 모셨다.

그러나 이 일은 곧 들통나고 말았으며 이 일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경찰주재소(일관헌)로 끌려갔다. 일경은 ‘일본과 조선이 한 나라가 되었는데 어지 옛왕조의 전패를 모실 것을 고집하여 국법을 어기려 하느냐?’고 하며 모진 형을 가하였지만 오방렬은 의연히 “나라가 없다 하여도 우리의 황제폐하가 계신데 어찌 전패를 매안할 수 있느냐? 조선 백성이 하루아침에 일본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눈을 똑바로 떠서 관헌을 쳐다보았다.

또한 그 후 여러 사람을 시켜 ‘공모자를 밝히고 전패 모신 곳을 알려 주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큰 상을 내릴 것이라’고 회유하려 하였으나‘공모자도 없을뿐더러 조선의 전패를 모신 곳을 물 밖의 이리떼가 알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일본 헌병들이 모진 형을 가하며 다시 묻자 그는 조선인 통역에게 ‘이리 같은 왜놈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너는 이 나라 백성이 분명한데 어찌 왜놈의 탈을 썼단 말이냐?’하며 침을 뱉고 입을 다물어 대답하지 않았고 온갖 악형에도 태연하였다.

마침내 석방되었으나 형독(刑毒)으로 그 해(1916) 5월에 돌아가셨다.(냇가의 풍년마을 503쪽) 남당 김진응(金震應)은 海邑一書生 獨扶韓社稷(바닷가 한 고을의 일개 서생이 홀로 대한의 사직을 붙들었도다)이라고 찬양하였다.

그런 고난을 거쳐 전패는 끝내 땅 속에 묻히지 않고 향교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내력을 당시의 사건을 지켜본 한 유생이 나무 판자에 새겨 함께 보관해 두었으므로 해방 후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작성 041031, 보완 130704, 151229, 17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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