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말 기르던..고산1리 차귀진 성터(遮歸鎭城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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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말 기르던..고산1리 차귀진 성터(遮歸鎭城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8.2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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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성과 함께 진성으로 평야형의 특징을 갖춘 성'


고산1리 차귀진 성터(遮歸鎭城址)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2228 (고산리사무소 서쪽 100여m 지점)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진성)

 
 

차귀진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인 목호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효종3년(1652) 봄에 이원진 목사가 앞에 차귀도가 있으므로 이를 의지하여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진을 설치할 것을 아뢰어 설치하였다.

여수(旅帥, 약 125명의 병력)를 두었는데, 병력은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132명으로 총 135명이었다. 숙종1년(1675)에 여수를 파하고 조방장(助防將)을 두었다.

숙종32년(1706)에 송정규(宋廷奎) 목사는 이를 만호로 승격시켰으나, 숙종42년(1716) 황구하(黃龜河) 어사가 형편을 살펴보고 만호를 파하고 다시 조방장을 환원하였다.


전체적인 지형은 동고서저형으로, 마을의 동쪽은 청수리, 서쪽은 해안과 인접한 봉수대가 설치된 당산봉이 있다. 성의 둘레는 1,190척(약 370m)이고, 높이는 10척(3.1m)이다.

동서 190m, 남북 110m(둘레 620m)의 동서 방향으로 장축(長軸)을 갖는 타원형의 성이다. 동서로 초루가 있었고,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무기고 등이 있었다.

차귀진에 소속된 병력은 조방장 1인, 치총(雉摠) 2인, 성정군 (城丁軍) 132명, 봉수연대 별장(別將) 12인, 봉군(烽軍)24명이 있었다.


차귀진은 지형적 입지 조건으로 볼 때 수산성과 함께 진성으로서 평야형의 특징을 갖춘 성이다. 따라서 해안형과 특성을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방어 유적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증은 우포(용수리 해안)를 대정현에서 대강을 붙일 수 있는 여섯 곳의 포구 중 하나라고 하면서 이곳을 관찰하고 비교적 자세하게 그 정황을 적어 놓았다.

이곳은 1675년(숙종 1)에 어사 이선이 순무할 때 차귀진을 옮기려고 했던 곳이라고 하면서, “죽도와 마주하는 곳”인데, “우물이 없어 흠”이라고 하였다. 죽도는 바로 차귀도이다.


『탐라지』에서는 죽도는 “사면이 모두 석벽이다. 동남쪽에 배가 머무는 곳이 있어 왜구가 여러 번 이곳에 들어왔다”고 기록할 만큼 예로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아 신경이 쓰였던 곳이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성문은 동문 서문 2개소가 있었고, 성 안에는 3채의 건물이 있었다. 현재 성의 윤곽은 없어졌고, 고산리 양태수씨의 집 울타리에 축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100㎝×110㎝, 100㎝×80㎝ 크기의 성석(城石)이 1단 정도만 15m 가량 남아 있다. 굽돌의 형태로 보아 기울기가 일직선으로 된 거친돌 허튼층쌓기로 추정된다.(제주의 방어유적 109∼110쪽)


지금도 고산리 주민들은 이 지역에 대해서 '성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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